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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데보라 스미스가 문학가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공공연한 희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한 작품을 두고 오역 논쟁도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제 문화 관련 수업 시간 중에 번역과 문화를 발표한 학생들도 채식주의자 번역에 오역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보아도 번역에는 틀린 부분이 나타납니다. 의도적이었을까요? 아니면 한국어 실력에서 온 문제일까요?   번역은 오역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역이 언어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문화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언어 실력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단 오역에서 언어 실력에 의한 문제는 논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내용은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도 원저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전하기에는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의역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의도적인 오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오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생경하거나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문화를 달리 번역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됩니다. 물론 언어나 문화 번역 시에 주석이나 설명을 다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번역에서 가장 멀어진 것을 우리는 번안이라고 합니다. 소설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원래의 내용과 전체적인 스토리나 소재, 대사 등은 비슷한데 등장인물이나 장소 등은 독자들이 있는 곳으로 변경되는 경우입니다. 예전에 저작권 문제가 엄밀하지 않던 시절에는 원작자의 허락 없이 번안 작품을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나라의 유명한 작품이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노래라면 원작자를 안 밝히는 것은 표절이겠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그 기준도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스토리를 몰래 차용한 소설이나 영화 등은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번안과 차용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로 시작하는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하여 부른 것입니다. 원래 노래와 가사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도 매우 좋습니다. 박효신이 부른 ‘눈의 꽃’은 일본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입니다. 가사가 거의 같다는 점에서 번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곡을 부른 나카시마미카도 독특한 분위기로 노래를 부릅니다. 일본 노래 제목도 유키노 하나 즉, 눈의 꽃이라는 점에서 제목까지 같게 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눈의 꽃이라는 제목은 그 제목만 봐도 일본어의 형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었다면 눈꽃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도 일본어식 표현입니다. 당연히 우리말로는 피눈물입니다.   번안 소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신파극으로 유명한 조중환의 ‘장한몽(長恨夢)’일 겁니다. 이 소설은 일본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 작품 역시 원래는 영국의 작품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번안을 번안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안을 하면 문화와 배경, 등장인물 등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어찌 보면 문화 번역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과 번안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줍니다. 직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의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스토리만 남기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번역 속에서 문화의 문제를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번역과 번안 번안 작품 번안 소설

2024-11-17

[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와 옥탑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후 한국 영화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한국 영화가 갑자기 세계 속으로 등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를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한국 영화의 수준과 재미가 이미 할리우드의 수준을 넘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입니다.     전 세계적인 방송의 배급이 시작되고, 코로나19라는 위기와 맞물리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그야말로 천정부지입니다. 서구 시장에 그 시작을 알린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말에도 있었지만,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감상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다가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벽을 봉준호 감독이 깨뜨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화 기생충에서는 재미있는 번역이 많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옥스퍼드로 번역한다든지 하는 장면들입니다. ‘반지하’와 ‘짜파구리’도 번역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반지하 방에 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서구인에게는 충격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반지하는 한국에서 서민 생활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반지하 방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지하라는 말을 문화적으로 번역한다면 수많은 함의가 있을 겁니다.   반지하는 첫째,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입니다. 늦게 해가 뜨고 빨리 지는 어두운 곳이기도 합니다. 어두움이라는 상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 반지하는 사생활의 보장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쳐다보고, 들여다봅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엿보기도 하는 곳입니다. 쳐다보는 게 싫어서 하루 종일 커튼을 치기도 합니다. 더 어두워지는 곳이지요. 셋째,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먼지가 들이닥치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안락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인생의 종말로 갈 수도 있는 곳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은 가상의 공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서울의 수많은 사람이 반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고, 태풍이 불면 반지하는 늘 아슬아슬한 장소입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해가 발생하면 늘 제일 먼저 비추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제일 늦게 보여주던 곳인데 말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주거의 빈부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지하와 반대되는 공간이면서 낭만적인 공간처럼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옥탑방입니다. 옥상에 있는 작은 방에서 사는 모습이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시야가 탁 트이고,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죠. 종종 친구들과 모여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옥탑방은 때로 비가 새고, 춥고 더운 곳이고, 매우 저렴한 주거공간입니다. 반지하를 옥상으로 올려놓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지하가 가족의 공간이라면 옥탑방은 가난한 청년의 공간입니다. 서양의 펜트하우스와는 그야말로 거리가 멉니다. 천지 차이의 공간입니다. 그래도 옥탑방이 한국인에게 낭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다행입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의 주거문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밝은 곳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많습니다. 부잣집의 건물은 주로 갤러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화려한 건축물이나 넓은 마당의 저택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찾아보기 쉬운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지하와 옥탑방은 찾으려고만 마음을 먹으면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어두운 측면도 문화입니다. 어두운 부분,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해도 문화 이해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 옥탑방 반지하가 가족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2024-11-10

[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의 세계

한류를 이끈 드라마에는 특별한 소재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한국의 전통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만의 소재였습니다. 우리 역사가 소재가 되는 게 우리에게는 당연하겠지만 외국인도 좋아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대장금이 엄청나게 인기가 높을 때는 일회적인 현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남아시아, 중동 등에서도 인기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주몽이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의아함이 커졌습니다. 왜 한국의 사극이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요? 한국의 역사적 내용이나 복장, 전통문화에 대하여 외국인은 이해가 가능할까요?   물론 한국 사극의 인기는 스토리 전개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장금과 주몽뿐 아니고 그 후에도 사극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외국에는 한국 사극의 광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한국 역사드라마의 모든 내용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의 역사를 더 많이 아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들도 정확히 알고 있고, 역사적인 시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한국 드라마 팬 중에는 한국 사극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배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해 보면 사극이 참 많습니다. 한국 사극에 매력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삼국시대의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연개소문이 있고 우씨 왕후, 선덕여왕 등이 있습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나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이나 고려 거란전쟁, 기황후 등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사극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드라마도,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숙종부터를 살펴보면 그 면면이 화려합니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고, 또 다른 부인인 영조의 어머니인 ‘동이’가 있습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야기가 있고, 손자인 정조 ‘이산’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선말의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도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중에는실재 인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실재 인물이라고 하여도 극히 일부분만 소재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허준, 황진이, 어사 박문수, 신돈 등도 그런 이야기에 속합니다. 퓨전 사극의 유행도 대단합니다. 소재만 사극의 형식을 빌려온 것입니다. 역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옷이나 전통적인 내용만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균관 스캔들은 중동지역까지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해를 품은 달, 달의 연인, 다모, 구르미 그린 달빛, 슈룹 등 수많은 이야기가 사극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이제는 과거로 타임 슬립을 하거나 반대로 과거 사람이 현대로 오는 이야기 등에서도 사극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과거에서 온 ‘도깨비’나 과거로 간 ‘철인왕후’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제는 좀비 영화에도 사극이 등장합니다. ‘킹덤’은 좀비 사극입니다.     그런데 사극의 인기를 보면서 의아한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번역입니다. 때로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투가 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든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등은 어떻게 번역할까요? 내용뿐 아니라 그 분위기의 번역이 쉽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전통적인 소재는 번역이 매우 어려울 겁니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설명이나 허준에 나오는 한의학에 관한 설명도 무척 어려웠을 겁니다. 직위에 대한 번역도 쉽지 않습니다. 영의정이나 판서, 사또나 이방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사극을 정확하게 그 맛을 살리며 번역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합니다. 한국어의 수준도 더 높아져야 합니다.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의 갈 길이 멉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한국의 사극을 맛있고, 멋있게  번역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 사극 번역 한국 사극 한국 역사드라마

2024-11-03

[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무시하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깔본다고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물론 아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 강도는 훨씬 셉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무시를 ①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②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시가 안 보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내려 보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못 본 척이 아닐까 합니다. 봐도 못 본 척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면 기분이 상합니다. 인사는 사람의 일이라는 뜻인데,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안 한 것이고, 나를 사람 취급 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투명 인간 취급한 겁니다.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인 ‘업신여기다’는 방언에 ‘업시여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본 척도 안 하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겁니다. 무시하는 게 안 좋은 거죠.   그런데 무시해도 좋은 게 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무시하면 좋을까요? 우선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못 본 척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봤다면 아예 잊으면 더 좋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본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모르는 척도 배려입니다.     저는 무시의 상반되는 상황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다’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깔보다와내려다보다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올려보다나치켜뜨다도 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노려보다, 째려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는 게 감정을 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살펴보다와돌보다입니다. 살피는 것도 보는 것이기에 살펴보는 것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겹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살피는 것과 두리번거리는 것은 다르다고 봅니다. 무엇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살펴보는 것은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는 돌아보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말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돌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을 돌아보거나 건물을 돌아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본다는 말에서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런 느낌의 표현입니다.   무시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화가 나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돌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내 눈의 온도를 생각해 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우리말 표현 사람 취급 존재 의의

2024-10-27

[아름다운 우리말] 랑그와 파롤과 세상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먼저 맞닥뜨린 괴로운 용어가 저에게는 랑그와 파롤이었습니다. 언어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세운 개념으로 현대 언어학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랑그와 파롤은 설명도 어렵지만 이해도 간단치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랑그와 파롤의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히 파악이 안 되는데 번역어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언어학책에서는 그냥 ‘랑그’와 ‘파롤’이라고 씁니다.   랑그는 머릿속에 있는 공통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각각 ‘사람’이라고 말을 하면 어느 한 소리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각 개인이 사람이라고 발음을 할 때마다 소리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이 발음하였던 사람이라는 발음이 파롤입니다. 파롤은 변화하는 것이고, 랑그는 변화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파롤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랑그를 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기역 소리라고 인식하고 있는 음을 음운이라고 합니다. 이 음운이 바로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의 측면에서는 ‘나무’라고 말하면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개념을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마다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소리를 연구하는 것은 음성학입니다. 음운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운을 연구하는 것은 음운론이고, 음성을 연구하는 것은 음성학이라고 하는데 연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론’과 ‘학’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도 사람마다 민족마다, 문화마다 인식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랑그와 파롤을 다시 찾아보면서 오랜 고민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소쉬르에게 랑그와 파롤이 중요했는지를 알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더 설명하자면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이 왜 현대 구조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치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해석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랑그는 사회이고, 파롤은 개인입니다. 랑그는 사회 속의 소통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공통을 찾아야 합니다. 공통을 발견하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랑그는 힘을 발휘합니다. 모두가 어긋나버리면 랑그는 힘을 잃습니다.   반면에 파롤은 개인이기 때문에 다름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변화는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랑그를 연구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현재에 주목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통시적인 언어이지만, 추상적인 공시성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파롤은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차이이면서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이면서 변화입니다. 이후의 연구에서 랑그보다 파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회 속의 소통과 조화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차이와 자유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랑그와 파롤은 각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소쉬르의 개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는 체계를 이루면 맞물려 있습니다. 랑그를 떠난 파롤은 소통의 세계를 벗어납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파롤이 사라진 랑그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답답하게 일치된 사회일 뿐입니다. 소쉬르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체계, 겉과 속의 체계를 나눕니다. 앞에서 설명한 음운과 음성, 공시와 통시, 개념과 청각영상 등은 모두 양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양면은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혼자인 듯하지만,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남과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남이 없다면 다르다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언어학의 개념을 살피면서 오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공시성에 연구 현대 언어학 음운과 음성

2024-10-20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의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언어는 늘 변한다. 그러면서도 늘 동시대 언중과 소통이 가능하다. 늘 변하면서도 늘 소통 가능한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개인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어린 시절의 내 언어와 현재의 내 언어는 전혀 다르며 앞으로의 언어도 달라질 것이다. 어릴 때 나의 말소리와 현재, 미래의 음성은 차이가 있다. 귀여운 목소리와 쉰 목소리가 같을 수 없다.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다. 어휘의 양과 질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릴 때 내가 사용한 어휘의 총량과 현재, 미래의 어휘량은 다르다.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어릴 때는 쓰지 않았던 경우가 많으며,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앞으로 계속, 자주 사용할지는 알 수 없다. 자주 쓰는 표현, 자주 쓰는 문법도 달라지고, 유행하는 새로운 말 등 계속해서 개인의 언어는 달라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여산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라는 말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를 보면 ‘사회(社會)’인데 여기서 사(社)는 토지의 신을 의미하며,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소사이어티의 번역어로서 ‘사’를 택한 것은 ‘축제, 제사’를 위해 모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사회’의 모습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에는 감사, 경배, 용서 등의 다양한 감정과 행위가 동반되었다. 이 속에서 조화와 협조가 필요하고, 그때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이 힘이 발휘한다.   따라서 언어는 사회 속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된다. 함부로 바뀌어서도 안 되고, 나만 바뀌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관계다. 사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만 빠르게 변해서는 안 되므로 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머물고 활동하는 사회와 다른 사회는 항상 소통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서로 떨어진 사회일수록 변화의 속도도 다르고, 변화의 결과도 다르다. 지역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다. 또한 공유한 집단에 따라서도 언어는 달라진다.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도 시간에 따라 언어가 변한다. 그 속도와 형태는 지역과 계층 또는 둘의 합 속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 변화의 모습을 살피고,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거슬러 오르는 것을 통시적 연구, 역사언어학이라고 할 수 있다. 통시는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시기를 전제로 한다. 조선시대의 언어가 현대에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이다. 신라시대의 언어와 고려시대의 언어와 조선시대, 현재의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인 것이다. 종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엄밀히 말해서는 정확한 한 시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시기가 있다고 가정하고 연구하는 것을 공시적 연구라고 한다. 16세기, 17세기 등등은 각각 공시적이고, 현대어 역시 공시적이다. 수많은 공시가 모여서 통시가 된다. 달리 말해 수많은 공시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통시적 연구이다. 역사언어학은 수많은 공시의 묶음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꼭 여러 언어를 비교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언어학이 비교언어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를 통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어의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그 꼭짓점을 찾다 보면 서로 관계있는 언어를 만나게 되고, 그 언어 사이의 공통점을 찾고, 변화 양상을 찾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언어학은 비교언어학이 된다. 비교언어학은 그 시작점이 역사언어학일 수밖에 없다. ‘비교’는 같은 계통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며, 같은 계통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 변화과정을 논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변한다. 언어는 변화 속에서 소통하며, 소통 속에서 변화한다. 역사언어학은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며, 우리가 서로 관련 있음을 찾는 과정이다. 언어의 형태, 음운, 의미의 변화를 살피면서 인간의 기원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변화의 자유로움을 찾기도 한다. 언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역사 계통 언어 언어 사이 그때 언어

2024-10-13

[아름다운 우리말] 아린 남산 풍경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이 기쁨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하고, 아련함이기도 합니다. 직접 가보는 곳도 있고, 생각 속에만 있기도 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곳도 있습니다. 가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과 멀리서 바라보는 감정은 각각 다릅니다. 거리가 보여주는 감정의 차이이기도 하고, 마음의 아릿함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제가 있는 학교의 연구실은 교수회관이라고 부릅니다. ‘회관’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오래된 느낌입니다. 어린이회관이나 문화회관, 마을회관 등이 생각납니다. 교수회관은 실제로도 오래된 건물이어서 감상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수회관에서 학교의 중앙도서관이 바로 연결되는 특이한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수들의 연구실을 둘러 베란다처럼 생긴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면 마음속 잡생각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구실 밖의 공간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입니다. 심지어 교수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마도 대부분일 겁니다. 저도 이곳에 나가본 게 오래되지 않습니다.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경희대에서 벚꽃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귀한 곳이기도 합니다. 봄에 혼자 벚꽃 잔치를 즐기면 왠지 마음이 부유해진 느낌입니다. 저를 찾는 제자들에게 이 귀한 광경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이 제일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녁놀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정말 멋진 곳이죠.   한편 여기에서 보이는 풍경 중 저의 마음을 울리는 장소도 있습니다. 바로 남산타워입니다. 남산타워는 서울타워나 엔 타워로 부르기도 하지만 제게는 남산타워라는 이름이 친숙합니다. 제게 남산타워는 때로는 첨탑으로, 때로는 바늘로 다가옵니다. 뾰족하네요~ 아슬아슬한 느낌입니다. 사실 저는 남산타워에 올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남산타워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25년을 살았습니다. 어릴 때 제 기억은 모두 남산과 남산타워입니다. 그 근처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녀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가에는 ‘남산’이 들어가 있습니다. 남산이 저의 고향인 셈입니다.   남산타워는 남산에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고향을 상징합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남산타워에 올라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산에는 자주 올라갔습니다. 문득 남산에 올라가 웅변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목소리가 큰 것은 그때의 산 공부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산에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께 혼난 후에 남산으로 간 적도 있고, 왠지 기분이 울적해도 남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은 저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다시 그때를 돌아보면 남산은 즐거운 기억과 아린 기억이 엉켜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어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나 모든 게 싫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제 모습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저는 연구실에서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남산타워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가만히 그쪽을 바라봅니다. 노을이 질 때면 감성이 더 몰려듭니다. 첨탑이 더 뾰족하게 보이는 날이면 왠지 예전의 저로 돌아갑니다. 그때를 잘 이겨내고 자라난 제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고생 많았다, 잘 지나왔다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조만간 남산타워를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타워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새로운 기억이 될 듯도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남산 풍경 남산타워 아래 남산 풍경 모두 남산

2024-10-06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 춤과 치유

우리 민족에 대한 중국 역사책의 설명을 보면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춤과 노래를 밤늦도록 즐긴다고 하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러한 음주 가무는 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제사는 엄숙하기만 한 행위가 아닙니다. 제사는 감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위로의 시간이기도 하며, 치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마음의 병을 낫게 하고, 몸의 병을 고칩니다.     북소리와 함께 치유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하늘에 닿는 춤으로 치유하는 예의 무천(舞天)에서 우리는 이름만으로도 위로를 받습니다. 제사의 이름이 곧 음악이고, 춤입니다. 북소리를 듣는 사람도, 하늘도 감명을 받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추는 춤에 희열을 맛봅니다. 제사는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축제입니다. 모두가 모여 즐거우면 하늘에 우리의 뜻이 닿는 겁니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흥겹게 노래하고 뛰며 춤추면 그게 바로 축제이고 제사입니다.   우리 춤에 양반춤이라는 춤이 있습니다. 양반춤은 오광대놀이에서 양반을 풍자하기 위한 춤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양반탈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반춤에서 위로를 받았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풍자가 시원하기는 하나 치유가 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오히려 양반춤은 양반이나 선비가 마음으로 추는 춤이어야 위로와 치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양반춤을 선비춤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듯합니다. 양반에 대한 풍자보다는 선비의 마음속 여유와 깨달음을 보여주는 춤이라고나 할까요?   하긴 양반이라는 단어도 풍자의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좋은 의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만하면 양반’이라든지 ‘양반 되기는 글렀다’는 말은 양반을 좋게 보는 표현입니다. 선비라는 말은 현세대에도 좋은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선비는 주로 글공부를 즐겨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지나치게 경제관념이 없는 답답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죠. 하지만 선비정신이 우리를 지탱해 온 정신의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돈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지금도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양반춤, 선비춤은 춤은 종류도 다양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춤은 이종태 선생께서 추는 양반춤입니다. 이 춤은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덩실거립니다. 어깨춤에 활짝 펴는 부채 소리는 바람을 가릅니다. 한 마리 학처럼 한 발로 서기도 하고 뱅그르르 돌다가 훌쩍 뛰어오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은 너울너울 인생길입니다. 춤이 멋들어집니다. 인생의 고갯길을 넘어온 춤입니다.   이종태 선생 춤의 백미는 표정에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종태 선생의 춤은 얼굴로 추는 춤입니다. 세상살이를 잊고, 세상일에서 떠난 초월의 표정이며, 달관의 몸짓입니다. 자연스러운 웃음에 보는 이도 웃음 짓고, 함께 시름을 잊습니다. 보는 이도 어깨춤이 절로 납니다. 한을 담은 우리 춤이 많이 있습니다만,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춤이라면 이종태 선생의 양반춤을 들고 싶습니다. 가볍지 않은 춤사위에, 인생을 담은 손짓, 희로애락을 지나는 걸음걸이는 우리 춤의 치유 효과를 보여줍니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은 물욕 없는 선비의 청렴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저는 이 춤을 보고 양반춤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리 춤의 긍정적 효과네요. 1년 넘게 양반춤을 배우고 있지만 그 맛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멋과도 거리가 멉니다. 무엇보다도 그 표정을 담기에는 가야 할 길이 아득합니다. 지난주 요양원에서 국악치유공연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저도 양반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모습에 가려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지 않아서 안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는 동안 긴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저도 모르게 표정도 자연스레 풀렸습니다. 뛰어오름도 가벼워졌습니다. 자연스러운 웃음도 나옵니다. 그 시간 세상일이 머릿속에 남지 않습니다. 춤을 마무리하면서 한 발로 서는데 흔들림이 없네요. 자연스러우니 몸이 가벼워집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치유 양반춤 선비춤 치유 효과 이종태 선생

2024-09-29

[아름다운 우리말]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며

글쓰기는 쉬운 수업이 아닙니다. 예전 중고등학교의 작문 수업은 휙 지나가는 수업이었습니다. 시험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과목이었습니다. 지금 작문이 그래도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논술 시험 때문일 겁니다. 시험이 있어야 중요해지는 게 공부라는 점이 서글프지만, 그래도 시험 때문이라도 글쓰기를 연습한다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글쓰기 수업을 제대로 들은 경험이 적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림일기를 쓰면서 작문을 했습니다. 일기의 글쓰기 효과는 늘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데,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그림까지 그려야 할 때는 죄책감이 가득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해수욕장을 그리고 일기를 쓴 기억이 납니다. 거짓이었기에 오랫동안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후 글쓰기 수업은 기억이 없습니다. 국어 시간에 작문은 그저 지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쓰는 게 좋은지 첨삭지도를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을 겁니다. 국어가 읽기 위주의 수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좋은 글을 읽었던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맞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글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 글쓰기를 아무리 노력해도 효과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라고 할까요? 제가 글쓰기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재수 시절이었습니다. 고3 때는 논술고사가 없었는데, 재수할 때 논술고사가 처음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기억입니다. 그때 대입 시험을 마치고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글쓰기를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글 쓰는 요령을 배웠다기보다는 내 글쓰기에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는 소나기를 쓰신 황순원 선생님께 문장론이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역시 글 쓰는 기술보다는 글쓰기의 태도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간명하고, 쉬운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서정범 선생님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국어학자이면서 수필가였던 선생님은 제게도 국어학자와 수필가의 길을 권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는 시작점이 그때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없애고 자신을 마주하여야 합니다. 저는 제 글 속에 남은 거짓을 지우려 노력합니다. 또한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나를 남처럼 바라보면서, 남을 나처럼 바라보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대로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제자에게 글쓰기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음속의 불안이나 우울, 답답함을 글로 풀어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언어화라고 하는 데, 말과 글로 자기를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힘입니다. 대학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적인 힘이며, 사회적인 힘입니다. 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내 글쓰기는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정신적인 힘입니다. 저와 글쓰기를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글 쓰는 시간이 치유와 행복, 깨달음의 시간이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수업 시작 글쓰기 수업 작문 수업 이후 글쓰기

2024-09-22

[아름다운 우리말] 바보가 남을 바보로 여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갈등과 분노가 한가득입니다. 갈등과 분노의 원인은 주로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상대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가 됩니다. 사람들은 늘 얼굴이 벌겋고, 화가 나 있습니다. 위험한 사회입니다. 언제든지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인 겁니다. 불안 불안합니다.   바보는 어떤 사람이 바보일까요? 바보라는 말의 어원은 ‘밥보’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밥보는 밥을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먹보랑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보에는 바보의 느낌은 없습니다. 그저 많이 먹으니 욕심꾸러기라는 생각은 들 겁니다. 바보는 욕심보다는 어리석음과 연결이 됩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밥을 많이 먹는 것을 어리석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많이 먹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남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니 어리석은 겁니다. 남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배가 불러도 계속 먹으면 어리석습니다. 특히 주변에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 어리석은 정도는 심해집니다. 내 배가 부른데도 다른 이는 살피지 않고 계속 꾸역꾸역 입안으로 음식을 넣습니다. 그게 바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바보가 넘쳐납니다. 내 배를 부르게 하는데 신경이 가 있어서, 주변의 배고픔을 모르는 체한다면 바보입니다. 옆집의 누가 배고픈지, 이웃의 누가 힘들어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달리 말하면 배부른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나라는 못된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만족하는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줄은 모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쉽게 남을 바보라고 욕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욕을 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세상에 바보가 너무 많다고 혀를 찹니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는 세상에 바보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바보로 여기고, 아이는 어른을 바보로 여깁니다. 노인은 젊은이를 바보 취급하고, 청년은 노인을 바보라 여깁니다. 선생은 학생을 바보로 여기고, 학생은 선생을 바보로 여깁니다. 남자는 여자를 바보로 여기고, 여자는 남자를 바보로 여깁니다. 진보는 보수를 바보로 여기고, 보수는 진보를 바보 취급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보 취급하니 바보는 점점 늘어납니다. 온 세상이 바보 천지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상에 바보가 참 많습니다. 저렇게 바보가 많으니 세상에 갈등과 분노와 화와 멸시와 차별이 가득하겠지요.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저 바보로 보일 겁니다. 저는 오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세상입니다. 바보는 남을 바보로 여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바보 바보 소리 제일 바보

2024-09-15

[아름다운 우리말] 아이유와 이지은

한국어 교재를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교재에 등장하는 이름이 저자의 자녀이거나 친구의 이름인 경우도 있습니다. 교재의 이름은 일반적이고, 발음하기 쉬운 게 좋습니다. 그런데 교재에 등장하는 외국인 이름을 부를 때는 좀 더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교재에 등장하는 ‘마이클’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마이클아!’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이름일까요, 성일까요? 교재에 서양인은 성과 이름이 다 안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인은 성과 이름이 같이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기준이 뭘까요?   이름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 또는 사용이 있습니다. 보통은 성과 이름을 포함한 전체를 이름이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는 조현용이 이름이지요. 그런데 금방 이야기한 것처럼 성을 제외한 부분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현용입니다’와 같이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어는 이름에 관한 질문부터 어렵습니다. 성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겁니다.   한국어는 다른 말과 달리 부모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립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이름을 이야기할 경우에는 무슨 자, 무슨 자와 같이 표현합니다. 제 이름을 예로 들자면 ‘현 자, 용 자를 쓰십니다’와 같이 이름을 설명합니다. 한자 이름을 쓰는 주변의 나라에는 이러한 금기는 없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예전에는 이름 자체를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처럼 느껴진 것 같습니다. 이름은 부모만 부르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자식이 크고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 대신 다양한 호칭이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호’나 ‘자’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따서 ‘무슨 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경우라면 별명이나 아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서로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습니다. 부르라고 만든 이름을 거의 아무도 부르지 않는 특이한 문화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름에 대한 문화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름에 관한 현상은 연예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더 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명은 드러내지 않고, 예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만 바꾸는 경우도 있고, 성만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모두 바꾸거나, 이름만 새로 만들어서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종 성이 무언지 혼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와 같은 성인 줄 알았던 사람이 나와 성이 다르고, 나와 성이 다른 사람이 알고 보면 같은 성이기도 합니다. 가수 나훈아는 나 씨가 아니고, 남진은 남 씨가 아닙니다. 서태지도 서 씨가 아닙니다. 성을 찾아보시면 재미있는 결과를 발견할 겁니다. 저는 종종 조용필이 조 씨라는 점이 왠지 다행스럽습니다. 훌륭한 대중음악가죠.   한편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성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히 케이팝 가수의 경우는 성을 쓰는 경우가 드물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BTS나 블랙핑크, 레드벨벳는 열렬한 팬이 아니라면 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가수들이 성을 쓰지 않는 것은 기억하고 부르기 좋다는 측면과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합쳐진 것이라고 봅니다. 성을 물어보는 퀴즈를 내면 얼마나 맞힐까요? 저는 세종학당재단 홍보대사였던 레드벨벳의 ‘강슬기’는 맞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수가 연기할 때는 본명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수인 자신과 배우인 자신을 구분하고 싶은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그런 시도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가수 ‘비’가 배우 ‘정지훈’으로, 가수 ‘아이유’가 배우 ‘이지은’으로 활동하면서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현상은 하나의 규칙처럼 되고 있습니다. 수지는 배수지로, 윤아는 임윤아로, 민호는 최민호로 활동합니다. 한국의 문화를 이해할 때 이름을 잘 살펴보는 재미도 솔솔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아이유 이지은 성과 이름 외국인 이름 한자 이름

2024-09-08

[아름다운 우리말] 학문행과 색독과 체서의 세상

학문행(學問行), 색독(色讀), 체서(體書)라고 글자를 쓰고 보니 전부 다 빨간 줄이 나옵니다. 모두 사전에는 없는 말이라는 뜻이겠죠.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이 중에서 학문행과체서는 제가 만든 말이니 사전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색독이라는 표현은 불교책에서 본 단어입니다. 기술적인 단어는 사전에 무척 많은데, 종교의 어휘는 매우 부족한 느낌을 받습니다.   학문행은 보시다시피 학문이라는 말에 행을 붙였습니다. 학문(學問)을 글을 배우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의 한자어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학문은 배우고 묻는다는 뜻입니다. 배우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학문이 아닙니다. 늘 물어야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물을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몰라서 물을 수도 있고, 토론하기 위해서 물을 수도 있습니다. 궁금함이나 호기심, 답답함은 모두 학문의 감정입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물음이 많아집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동전 양면과 같습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것도 많아집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저는 학문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묻는 것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실천은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실천은 서로 통합니다. 개인적 실천이 사회적인 경우도 있고, 사회적인 실천이 개인적 실천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운 것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학문에서 수많은 거짓을 봅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학문행이라고 부릅니다. 배우고 묻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학문행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바랍니다.   언어교육을 보면 언어를 배우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도구라는 말은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길 찾고, 물건 사고, 자기 소개하는 등 언어가 사람 간의 소통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언어 소통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읽기 교육의 방법과 목적은 무엇일까요? 눈으로 읽고, 소리내어 읽고, 마음으로 읽는 방법은 불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바로 색독입니다. 색독은 깨달음의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은 바를 실제로 몸으로 행동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독(體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은 책이 많을수록 행동할 게 많아집니다. 실천해야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많이 읽고, 단순히 골방에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쓰기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베껴 쓰기, 요약하기, 일상 쓰기, 설명하기, 주장하는 글쓰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도 역시 몸으로 글쓰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쓴 글대로 행동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려면 글에 거짓이 없어야 할 겁니다. 오랜 시간의 고민과 번민과 반성과 환희가 포함되어야 할 겁니다. 그래야 글대로 살 수 있습니다.     말하기와 듣기도 마찬가지겠지요.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사용하는 것은 도구의 기능을 넘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언어교육의 관점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체어(體語)와 체문(體問)도 새로운 주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온몸으로 말하고, 온몸으로 듣는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학문행 모두 학문 언어 소통 모두 사전

2024-09-02

[아름다운 우리말] 잘 가르치는 방법

남방불교 앙굿따라니까야(빠알리 경)의 다섯의 모음을 보면 가르침에 대한 논의가 나와 있어서 교육에 관하여 생각할 점을 줍니다. 교수법에 관한 이론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섯 가지 항목을 현대의 교육과 연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부처의 제자인 아난다 존자가많은 재가자들의 대중에 둘러싸인 우다이 존자가 설법을 하는 것을 보고 세존께 “세존이시여, 우다이 존자가 많은 재가자들의 대중에 둘러싸여 법을 설합니다.”라고 이야기하자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법을 남에게 설하기 전에 안으로 다섯 가지 법의 준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설법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교육에서도 지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로 순차적으로 가르침을 설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순차적이라는 말은 가르침의 순서입니다. 무엇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가르치는 것이 좋은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의 설계, 교수요목의 확정이 이 단계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면 가르침의 순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작이 어려워 아예 뒤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육과정)   두 번째는 되어감, 방편을 보면서 가르침을 설하리라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학습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학습자의 수준, 단계에 맞게 가르침의 방법과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학습자의 수가 많은 경우에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는 수업은 학생 수만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을 집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학생은 개인입니다. 학습자를 모르는 교사가 제대로 가르치기는 어려울 겁니다. 늘 반성을 주는 부분입니다. (학습자 이해)   세 번째는 연민으로 가르침을 설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장면이라면 이 말이 더 깊게 다가올 겁니다. 하지만 교육의 현장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자주 놓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학습자가 많고, 학습자의 모습이 이해 안 되는 순간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연민은 포기로 바뀝니다. 괴로운 순간입니다. (학습자에 대한 사랑)   네 번째는 욕심을 가지지 말고 설하라는 겁니다. 달리 설명하는 글을 보면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 말라고 합니다. 가르침에 물질이 관여되면 다른 목적이 선행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모든 강의의 최우선 지점은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기쁘게 가르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조건을 따지는 순간 가르침은 그르침이 됩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자연스러움이 가르침의 기본입니다. (욕심 없는 가르침)   다섯 번째는 자신과 남을 상처받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칫하면 가르침은 상처가 됩니다. 말도 행동도 가르침에서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남에게만 향하는 흉기가 아닙니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을 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가르치면서 스스로를 베어버릴 수 있기에 더 조심하여야 합니다. 칭찬과 멸시는 모두 가르침에서 위험한 요소입니다. 특히 자신을 향한 너그러움과 남을 향한 엄격함은 균형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가르침)   위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는 모두 위험 요소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즐겨하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르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잘못 가르쳤을 때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현실의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마음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잘 준비하여야 가르침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법 학습자 이해 순간 가르침 모두 가르침

2024-08-25

[아름다운 우리말] 우산과 양산

저 앞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 양산을 쓰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의 성별은 구별이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앞에 가는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지만, 뒤에 가는 사람은 여성일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치마를 입은 사람, 스커트를 입은 사람은 어떤가요? 갓을 쓴 사람, 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등등 복장은 사람의 성별을 구별합니다.     복장은 성별뿐 아니라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성향도 구별합니다. 청바지가 자유를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글라스가 상징하는 게 있고, 완장이 상징하는 게 있습니다. 노란 리본이나 빨간 열매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도 모두 상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에 무엇을 두르고, 입고, 쓰면서 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입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게 상징이고, 때로는 그 상징이 나를 나타내는 질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의 성별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산을 남녀 모두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죠. 이는 마치 갓을 쓴 사람은 남자일 거라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산을 쓰면 우리는 일단 여성일 것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부분 맞습니다. 실제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여성이 대부분입니다. 양산이 중요한 패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산도 원래는 여성이 주로 썼다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한 예전의 기록을 보면 남성이 우산을 쓰는 것은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영향 때문에 군인이 우산을 쓰는 게 금기처럼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산도 예전에는 여성적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뀝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우산을 든 영국신사가 등장하고 더 이상 우산은 여성의 상징이 아니게 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합니다. 로마의 장군이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스커트를 입고 행진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고정적인 상징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에게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유연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생각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왜, 여자가 왜?’라는 질문은 시대착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양산으로 돌아가면, 사실 이제는 양산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남성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 무더위 속에서 양산 쓴 많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햇볕이 강하면 양산을 쓰면 그만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고정관념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산이 그러했듯이 양산도 남자의 손에 자연스레 잡힐 날이 오리라 봅니다.   이번 여름 우리는 사상 최고의 더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어마어마합니다. 햇볕이 검은 머리를 태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양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머뭇거립니다. 올해 양산의 유혹을 강하게 느꼈지만, 고정관념의 벽은 넘지 못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남았지만 작은 결심을 해 봅니다. 내년에는 꼭 양산을 쓰겠다는 결심. 올해 참 더웠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우산과 양산 우산과 양산 양산도 남자 올해 양산

2024-08-18

[아름다운 우리말] 한국 드라마의 힘

한국 드라마는 한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기는 한국 노래가 중심에 있을지 모르나, 세대를 아우르고 남녀를 아우르는 인기의 중심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의외의 곳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를 만납니다. 겨울연가의 인기가 일본을 휘몰아쳤고, 가을동화의 인기가 대만을, 대장금과 주몽의 인기가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를 넘고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넘어갔습니다. 도깨비, 태양의 후예, 사랑의 불시착은 세상에 사랑을 알려주었습니다. 오징어게임은 그야말로 게임을 바꾸어주었습니다. 이제 한국 드라마는 세계 드라마의 중심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한 번 보면 헤어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국 드라마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배우들의 연기력과 탄탄한 이야기의 구성, 화면과 배경음악 등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할 겁니다. 예상을 뒤엎는 이야기의 반전은 늘 조마조마하게 만들죠. 종종 지나칠 때도 있지만요. ‘미스터 선샤인’의 화면은 정말 감탄하며 봐야 했습니다. ‘도깨비’의 배경음악은 어떤가요? 크러쉬와 에일리의 노래는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멜로디 속에서 밀물처럼 다가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여준 배우의 연기는 대단했습니다. 배우의 이름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연기자의 자연스러움은 한국 드라마의 힘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연배우뿐 아니라 조연의 연기에도 감동합니다. 그리고 그 조연은 서서히 주연의 자리로 올라옵니다. 조연을 응원합니다. 긴 시간 드라마 속에서 힘을 기른 연기자들을 응원합니다. 조연이 주연이 되는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한국 드라마의 힘은 대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드라마를 볼 때 대사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언어의 마술이 펼쳐지는 현장이 바로 드라마입니다. 노래가 짧은 호흡이라면, 영화는 중간 호흡이고, 드라마는 긴 호흡입니다. 드라마의 긴 호흡을 숨죽이며 따라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대사입니다. 사랑의 속삭임 같은 간지러운 대화도 있지만,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위로의 대사도 있습니다. 저는 사랑의 대화, 칭찬의 대화, 감사의 대화도 좋아합니다.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언어의 향연입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말, 더 예쁜 말을 사용하며 살 수 있기 바랍니다.   한편 나를 감동시키고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대사는 위로의 말입니다. 우리는 위로는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안아주고, 가만히 어깨 토닥여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만큼 큰 위로가 없습니다. 허나 때로는 말 한마디는 정신을 번쩍 나게 하고,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줍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입니다. 어둡고, 흐린 날에는 나의 아저씨 대사만 들어도 위로를 받습니다. 왜 많은 이에게 ‘나의 아저씨’가 인생 드라마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삶에 희망을 얻었다는 외국인을 만납니다. 일본에 많은 여성분이 한국 드라마를 만난 후 삶을 긍정적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고 싶은 한국 드라마가 많아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90세가 넘은 일본 할머니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학생도 한국 드라마에서 희망을 만납니다. 중동에서 사극의 인기는 대단합니다. 사극이 외국인에게 인기가 좋다는 게 신기합니다. ‘낭만 닥터’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좋아한다는 태국 의사도 만났습니다. 관심에 따라 좋아하는 드라마의 폭도 넓어집니다.   엄마 따라 한국 드라마를 보고, 아내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가족 간에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같이 웃고, 울면서 드라마를 보고,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국 드라마가 세상을 한층 아름답게 만들기 바랍니다. 한국 드라마는 아름다운 힘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드라마 한국 한국 드라마 세계 드라마 시간 드라마

2024-08-11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 번역의 맛

지명(地名)은 말 그대로 땅의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땅 이름은 고유명사이기에 다른 지명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명을 소개하고나 번역할 때는 무미건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지역의 맛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지명을 들으면 서울이 다르고, 대전이 다르고, 대구가 다르고, 부산이 다릅니다. 위치도 특징도 다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명에서 느끼는 감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 가사나 드라마, 또는 문학 작품에서도 지명은 도드라지게 다가옵니다.   앞에 언급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은 어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도시의 순서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도시 이름을 물어보면 주로 등장하는 이름일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의 경우는 한국인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 지명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교재에 보면 대전, 대구보다는 인천이나 경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천은 공항이 있기 때문이고, 경주는 물론 우리 역사의 주요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교재에는 설악산이나 제주도가 대도시보다도 먼저 나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습자의 경우엔 단순히 도시의 이름뿐 아니라 도시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까지 알아야 번역이나 통역에서도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문화 번역의 맛이 살아나는 겁니다. 문학작품이나 드라마에서도 지역의 특성을 알면 이해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경주가 어떤 도시인지 모른다면 경주에 가고 싶다는 말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경주 남산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경주 남산은 그냥 산이 아닙니다. 신라의 불교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살아있는 고고학의 현장이며, 불교 신앙의 현장입니다.   한국어를 잘 아는 외국인도 도시의 이미지, 특징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교수들과 한국 지명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명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곳의 특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습니다. 한국어를 무척 잘 아는 사람들도 지명을 번역할 때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의 예를 들어 볼까요. 춘천 하면 닭갈비나 막국수가 생각나야 할 겁니다. 전주하면 비빔밥이 생각나겠죠. 천안은 뭐가 생각나나요? 호두과자가 떠올라야겠지요. 천안에는 호두가 유명합니다. 그래서 호두과자도 발달하였을 겁니다. 천안 쪽의 휴게소에 가면 당연히 호두과자를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정부라고 하면 부대찌개가 생각나겠지요. 의정부에 미군기지가 있는 것과 부대찌개의 연관성도 떠올라야 할 겁니다. 다른 도시의 음식은 뭐가 있을까요? 특산물도 지명과 관련하여 기억할 내용입니다. 나주는 배, 대구는 사과, 공주는 밤, 성주는 참외, 가평 잣이 유명합니다. 완도는 김, 통영은 굴, 포항은 과메기, 벌교는 꼬막이 유명하지요. 영광의 굴비, 상주의 곶감, 제주의 옥돔, 흑돼지 등 기억할 내용이 많습니다.   요즘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기억 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전주는 한옥마을로 유명하고, 정동진은 모래시계로 유명합니다. 대전은 성심당이라는 빵집이 대전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대전역에 가 보면 많은 사람이 성심당 봉투를 들고 있습니다. 한편 용산은 예전에는 미군기지 등이 유명하였으나 이제는 대통령실이 있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지명의 특성도 이렇게 변화를 겪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살았던 서울 남산, 용산 이태원의 경리단은 전혀 다른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용산은 고등학교 이름입니다. 저는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지명을 보면서 어떤 상징이나 특징,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번역을 문화적으로 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의 감정이나 생활상까지 함께 담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곳에 가면 지명과 함께 그곳의 특산물, 특징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지명 공부도 중요한 한국어 공부인 셈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지명 번역 한국 지명 가면 지명 우리 지명

2024-08-04

[아름다운 우리말]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 속에 갇혀 있습니다. 머릿속에는 어제 일과 오늘 일, 심지어 다가오지 않은 내일 일까지 가득합니다. 삶이 괴롭다는 말은 머릿속에 괴로운 일만 가득 담고 살기에 생긴 말일 겁니다. 인간의 머리는 제한적이어서 한 가지를 생각하면 동시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괴로운 생각을 하면 즐거울 수 없습니다. 울던 아이가 금방 깔깔대고 웃는 것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두 가지 감정과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어제의 괴로운 기억을 되살려 곱씹고 살아가는데 삶이 즐거울 리가 없겠지요? 지금 나에게 닥친 일 중에서 힘든 일만 골라 생각하고 있는데 현재가 기쁠 리 없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그럼에도 오고 있는 내일을 걱정, 근심, 초조로 채우고 있는데 삶에 대해 설렘이란 있을 수 없겠죠. 사는 게 괴로움이라는 말은 어쩌면 내 머리와 감정의 편향성을 보여줍니다. 한쪽으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괴로움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모두 제 이야기일 겁니다. 굳이 안 좋은 쪽을 바라보고, 그쪽에 온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리되고 맙니다. 그런 자신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내보이기도 하고, 허탈한 감정을 속으로 쌓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 괴로움과 성장이라는 두 갈래 길은 고통에 대한 집중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일어날 뭔가를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 그렇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나 죽음의 시간은 옵니다. 영생을 이야기한 수많은 이도 일단은 모두 죽음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는 논리는 심한 공포를 줍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슬픕니다. 세상이 온통 괴로움의 바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보면 금세 걱정의 바다로 흘러가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에는 꼭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일어나는 일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죽는 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면, 죽지 않는 일은 절대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살면서 누구나 아프기에 아프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나 미워하는 이와 만나야 하는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 괴로움의 근원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 달리 말하면 내가 피할 수 없는 일에 꽂혀있다는 겁니다. 그 깊숙이 박힌 칼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괴로움은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무리하게 괴로움의 칼을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은 다시 그 괴로움을 향합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요? 되돌아가고픈 기억은 나를 괴로움에서 그리움으로 옮겨줍니다. 내가 의식조차 못 한 상태에서 나를 순간 이동시킵니다. 내가 가고픈 곳에 대한 바람은 나를 괴로움에서 그리움으로 옮겨줍니다. 내 의식의 한 점은 금방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겁니다.     즐거움이 있기에 괴로움도 있는 거라 말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괴로움이 있기에 즐거움도 있는 겁니다. 생각을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옮기면 세상이 밝아집니다. 살면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은 괴로움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의 점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점을 엷은 미소 속으로 옮기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생각의 점이 이 글을 쓰는 동안, 글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괴로움을 잊고 글을 쓰고 있었네요. 좋아하는 일, 기쁜 생각을 하면 괴로움의 크기는 줄어듭니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말로 생각의 점을 옮겨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상 괴로움 걱정 근심 모두 죽음

2024-07-28

[아름다운 우리말] 동물의 왕국 한국

동물의 왕국이라고 글의 제목을 쓰고 보니 한국은 정말 동물의 왕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동물이 정말 많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기르거나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동물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 까닭일 수도 있고, 외로움이 짙어져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니 사람 가족의 수는 적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유기견, 유기묘 천지라는 기사도 접하게 됩니다. 쓸쓸한 풍경입니다. 힘들 땐 가족이었다가 떠나갈 때는 그냥 짐승일 뿐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동물의 왕국은 진짜 동물의 세계는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하긴 인간도 동물이니 굳이 말하면 인간이 사는 동물의 세계이겠네요. 동물의 세상에서 가장 큰 특징은 적자생존입니다. 그리고 적자생존의 기본 원리는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바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인간 세상은 경쟁이 극대화된 세상입니다. 특히 한국이 그렇습니다. 경쟁이 극대화하면 분노와 우울도 극대화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환호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좌절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늘 분노와 우울이라는 두 감정이 공존합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빨리 오르기 위해서는 분노라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에너지이자 경쟁에서 이기는 에너지가 바로 분노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환호작약하여 뛰어오른 사람은 자연스레 떨어집니다. 늘 환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에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누구나 떨어지는 순간은 괴롭게 마련입니다. 경쟁에서 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분노의 에너지가 잦아들면 더 깊은 우울 속에 박히게 됩니다. 우울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분노와 우울이 만연해 있는 세상은 살기가 힘이 듭니다.   21세기 한국은 성장을 거듭하며 활기가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경쟁력이 오히려 무기였습니다. 경제도, 노래도, 드라마도 하면 된다는 마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제 경제뿐 아니라 문화도 군사력도 어느 나라에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경쟁이 기쁨을 준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경쟁이 지나치면 동물의 세계가 됨을 잊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동물의 세계에서 경쟁의 왕입니다.     텔레비전 속은 온통 경쟁의 세상입니다. 온갖 경쟁프로그램이 가득합니다. 연예인의 집을 보여주고, 가수 간의 경쟁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시청률이 나옵니다. 구독자와 조회 수는 그대로 돈이어서 세상은 자극의 일상화입니다. 남의 세상과 나의 세상을 늘 비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교가 아니라 대조가 됩니다. 남은 행복하고, 부유하고, 웃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며 한숨이 나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나는 쫓기거나 숨어있는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지금 동물의 왕국입니다. 청년의 우울증, 노인의 자살률이 심각합니다. 청년들은 결혼은커녕 연애도 안 합니다. 나라 전체가 활기를 잃고 있습니다. 활기가 사라진 곳에 먹고 먹히는 분노가 한가득입니다. 목소리가 커지면서 비판은 비난이 되고, 비난은 비꼼이 됩니다. 화는 화를 부릅니다. 분노가 분노를 부르고, 괴로움이 괴로움을 부릅니다. 적자생존의 세상, 동물의 세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울과 분노의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극적 생활을 줄여야 합니다. 모두가 이 고민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동물의 왕국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나도 분노와 우울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동물 왕국 왕국 한국 우울과 분노 진짜 동물

2024-07-21

[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한자와 한자어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한글과 한국어가 완전히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와 언어를 구별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글날에 한국어가 매우 과학적이라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이상한 주장입니다. 한글은 과학적일 수 있지만, 한국어는 과학적이라는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자와 한자어는 문자와 어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에도 한자어는 많지만 한자는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한자를 쓰는 것과 한자어를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순우리말을 쓰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순’이 한자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한자어 없는 언어생활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기초어휘에도 이미 한자어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기초어휘란 오랜 역사에도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어휘입니다.     따라서 비교언어학의 주 대상입니다. 자연이나 신체어, 색채어, 친족어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늘, 해, 달, 별, 땅과 같은 자연어나 머리, 눈, 코, 귀, 입 등의 신체어와 검다, 희다, 푸르다, 붉다와 같은 색채어, 아들, 딸, 엄마, 아빠 등과 같은 친족어가 기초어휘에 해당합니다. 모두 순우리말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초어휘 속에서도 한자어휘가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산(山)과 강(江)이 있겠네요. 또한 초록색이나 주황색, 남색은 당연히 한자어입니다. 친족어 중에도 형, 동생, 삼촌 등은 한자어입니다. 이렇듯 한자어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어린아이가 한문을 배우던 책인 소학을 한글 창제 이후 번역을 하게 됩니다. 두 가지 종류가 출간되는데, 하나는 번역소학(1518년)이고, 다른 하나는 소학언해입니다. 번역소학과 소학언해는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두 태도를 보여주며, 특히 번역소학에는 의역이 많아서 우리말 속에 한자 어휘가 얼마나 널리 사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한문을 배우는 책이기 때문에 한자어가 많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어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우리말 속에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번역소학에는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어휘가 나타나서 흥미롭습니다. 주로 고유명사인 인명이나 지명은 한자를 먼저 쓰고, 우리말을 적습니다. 공자, 안연, 맹자 같은 표현이 그 예가 됩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글에서 핵심어, 주제어로 보이는 말은 한자를 함께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덕, 학문, 강론, 쇄소응대, 선생 등의 단어는 한자에 우리말을 병기하여 쓰고 있습니다. 현재도 여전히 가독성을 위해서나 핵심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자를 섞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한자로 쓰지 않은 한자어입니다. 이 말들은 한자로 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물론 지식인층이 주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소학’이 어린아이용 학습서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한자어가 이미 생활 속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상, 례, 현인, 온공, 경계, 부모, 덕, 구하다, 후, 자제, 피하다, 흉하다, 길하다는 한자와 병기된 표기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글로만 쓰이기도 합니다. 혼동이 있음을 볼 때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번역소학에 한자로 쓰이지 않은 말을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500년 전에도 쓰이던 어휘를 보면서 한자어는 어느 나라 말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자어 나라 친족어가 기초어휘 한자 어휘 신체어 색채어

2024-07-14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로 보는 세상

우리가 언어를 보는 관점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언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학설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언어와 사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의가 많습니다. 사고가 먼저인지, 언어가 먼저인지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논의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논제입니다.     인간은 모두 개인입니다. 각각 따로 살고, 따로 보고, 따로 냄새 맡고, 따로 듣고, 따로 느낍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관의 세상을 삽니다. 우리는 나 아닌 사람의 세상을 모르고, 나 아닌 사람의 감각을 모릅니다. 우리는 마치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듯하나 우리는 다른 이의 경험을 직접 공유한 적이 없습니다. 서로 어떻게 보고 듣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느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본 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쌍둥이 사이에도 똑같이 감각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내 감각은 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주관의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객관의 세상을 꿈꿉니다. 왜냐하면 주관의 세상에서는 소통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모르는데 소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공감이나 동감이나 동정은 다 하나가 되자는 표현입니다. 내 속 깊이에 있는 그 무엇이 그의 속 깊은 곳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희망합니다. 이심전심의 세계는 주관과 주관의 소통을 깊이 보여주는 경지입니다.   모두 서로 다른 주관으로 살아간다면 소통은 어렵습니다. 상대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는 주관을 객관화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색을 볼지 모르지만 파란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 사이에도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는 그 차이마저 지우고 하나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은 같은 곳, 같은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이 흰색이고, 하늘이 파란색이고, 불이 붉은색임을 압니다. 저는 언어는 우리 주관이 약속한 객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화자의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 개념을 언어라는 청각영상을 통해서 구체화, 객관화합니다. 그러면 그 객관화된 언어는 청자의 머릿속에 다시 개념으로 주관화합니다. 언어가 없다면 객관적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로 다른 언어에는 분명하고도 깊은 골짜기가 놓입니다. 서로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언어가 다르면 머릿속 개념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느 언어에서나 바라보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한 세계라는 말은 그래서 너무나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푸른색과 영어의 푸른색은 다릅니다. 우리말의 ‘춥다’와 태국어의 춥다는 느낌이 다를 겁니다.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는 듯이 언어로 본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지기도 합니다. 언어로 본 세상은 곳곳마다 변화합니다. 언어는 우리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이심전심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언어를 떠나야 마음의 세상이 오는 것처럼 말하지만 언어의 세상이야말로 공통의 세상이고 소통의 세상입니다.     언어가 또 다른 언어를 만나는 순간은 늘 흥미롭습니다. 개인 간의 언어가 만나고, 사회 간의 언어가 만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만나 서로의 특별함에 놀라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모르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언어가 사고이고, 사고가 언어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주관적 개념 주관과 주관 머릿속 개념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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