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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참성이라는 말

오늘도 여러 책을 읽으며 진리를 공부하다가 ‘참성(僭聖)’이라는 표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사전에 없는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새삼 합니다. 참성의 참(僭)은 어긋난다는 뜻으로 ‘참람(僭濫)하다, 참칭(僭稱)하다’라고 할 때 쓰입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분수에 넘쳐 지나치다는 의미입니다. 참칭이라는 말은 멋대로 분수 넘치게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칭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의 예에는 왕을 참칭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성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책에서 참성은 깨달음의 적이고, 깨달은 이의 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깨달은 이의 세 강적 중에서 가장 나쁜 강적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인인 척하는 것이 깨달은 이를 모욕하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적인 셈입니다.     척하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깨달은 척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척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합니다. 잘난 척, 예쁜 척 등도 있습니다. 갑자기 ‘귀여운 척’이라는 표현이 생각나네요. 척 중에는 위험한 게 많습니다만, 그중 최악은 깨달은 척, 성인인 척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참된 사람을 욕합니다.   참성하는 이와 진짜 성인의 차이는 무얼까요? 일단 대부분의 성인은 스스로를 성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성인이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성인이어도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성인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게 진리의 길을 가고, 진리의 편이 되는 이가 성인인 겁니다.     참성하는 이는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참성하는 사람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저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성하는 이는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다른 이를 무시(無視)하고 업신여깁니다. 무시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길에 서 있다면 더 낮은 곳, 더 아픈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저는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기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즉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인 겁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참성하는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아프고 낮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높은 곳입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합니다. 권력자와 가깝고, 돈 있는 자와 가깝습니다. 무슨 무슨 자리에 연연합니다. 권력자와 가까운 것이 자랑이고, 권력마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돈 있는 자와 가까운 것이 기쁨이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직위를 탐내는 것입니다. 명예는 희생에서 오는 겁니다. 희생이 빠진 명예는 그저 자리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참성이 진리를 방해하는 강적이라는 말이 진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동안 더 다가옵니다. 왜 가장 나쁜 강적으로 표현하였는지 알겠습니다. 참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서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돌아봅니다. 돈이 좋고, 힘이 좋고, 자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과 아는 게 기쁜 삶이네요. 그러고 보면 참성은 멀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모르고,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 참성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가 진리를 방해하고 있는 사람임을 뼈아프게 느낍니다. 참성이 아닌 척 살고 있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진짜 성인 사람 취급

2024-04-21

[아름다운 우리말] 따라 부르기를 통한 치유

저는 요즘 경기잡가 중 집장가(執杖歌)를 배웁니다. 집장가는 경기민요 12잡가 중 하나입니다. 소춘향가(小春香歌), 출인가(出人歌), 형장가(刑場歌), 십장가(十杖歌)와 함께 판소리 춘향가에서 따온 노래입니다. 춘향가의 내용 순서로 보면 오리정의 이별을 노래하는 출인가와형장가의 중간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장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형장을 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집장 군노(軍奴)는 형장(刑場)을 치는 군졸을 의미합니다.   노래의 내용은 춘향을 형틀에 묶고, 사또의 분부를 들으라고 하는 집장군노, 사또 앞에서 죽여달라는 춘향, 살살치겠다고 속이는 집장군노, 형장을 매우 세게 치는 집장군노, 고통스러워하는 춘향, 말을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집장군노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형틀에 묶여서 매를 맞는 장면은 매우 무서운 장면이지만, 경기민요에서는 이 장면을 해학적으로 풉니다. 따라서 집장가 노래를 듣는 청중이나 집장가를 따라 부르는 제자는 슬픔과 분노, 해학과 풍자를 넘나들게 됩니다. 이는 판소리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웃음이 있는 우리 예술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희망 또는 웃음을 찾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실제로 인생의 고락(苦樂)이 오가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춘향전은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이별, 고통을 거쳐 만남과 행복의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각 부분 속에서도 희로애락이 엇갈리며 자리하게 됩니다. 집장가는 이런 우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부르는 이’나 ‘따라 하는 이’, ‘듣는 이’가 모두 공감합니다.   집장가 가사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요? 우선 한국어의 주요 특징인 음성상징어 즉, 의태어의 사용이 두드러집니다. ‘쫑그라니, 덥석, 좌르르, 느긋느긋, 는청는청, 허허, 풍기덩실, 지두덩실’과 같은 의태어는 모양을 흉내 낸 말로써 다른 언어로 번역이 어려운 표현입니다. 의태어는 동작이나 모습을 눈앞에 보듯이 나타내는 말이어서 이야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언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장가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는데 풍자와 해학의 대표적인 장치로는 속담과 과장법을 들 수 있습니다. 때리면서 ‘골 부러질라’라고 하는 장면, ‘지옥문 지키었던 사자가 철퇴를 들어 메고 내닫는 형상’이라고 집장군노를 묘사하는 장면, ‘좁은 골에 벼락 치듯 너른 들에 번개 하듯’과 ‘십 리만치 물렀다가 오 리만치 달려들어’와 같이 때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극히 과장스러운 모습으로 듣는 이에게 해학의 즐거움을 줍니다.   주로 스승께 민요를 배울 때는 가사를 보는 경우도 악보를 보는 경우도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부르며 스승을 모방하는 것이 민요 배우기인 겁니다. 이는 우리 민요가 악보로만 전달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을 겁니다. 음의 세밀한 변화는 악보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민요를 배우는 과정은 철저히 스승을 따라 부르는 과정입니다. 즉, 모방 속에서 자기 완성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민요 배우기는 노래를 배우는 과정뿐 아니라 스승의 감정을 배우고 함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밀한 감정의 변화가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고, 이러한 감정의 전이를 통해서 민요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집장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는 민요의 경우는 더욱 감정의 전수가 중요합니다. 민요 따라 부르기는 스승과의 감정 공유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스승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희로애락의 감정변화를 겪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치유 장면이지만 경기민요 집장가 노래 집장군노 형장

2024-04-14

[아름다운 우리말] 말하기의 단계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사회는 아무래도 글의 시대라기보다는 말의 시대로 보입니다. 정교하고 수려한 글보다는 하루하루 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기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말하기라는 점입니다. 말을 잘하는 중요한 방법은 놀랍게도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특히 듣는 사람이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거나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말하기의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합니다.     말하기 전에 듣는 사람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듣는 이가 내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큼 성장하였는지도 알아봐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도대체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소리’라고 합니다. 말을 소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큰소리, 잔소리, 흰소리, 헛소리는 모두 의사소통에 실패한 말입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우리는 일방향의 소리만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도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말하기입니다. 시간이 없는 이를 붙잡고 하는 말하기나 다른 관심사가 있는 사람에게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듣는 이의 수준이나 관심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저는 가르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유학의 글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도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내용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쉽게 가르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라니요. 저는 안 가르치는 방법도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말하기입니다.     말하기는 일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상대에 따라서 말하기는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윗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잘 설명하는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근기에 따른 설법을 이야기합니다. 상대의 정도에 따라 설명이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깨달음의 단계가 높은 사람과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똑같은 청자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보고, 달리 이야기하려는 태도야말로 늘 조심해야 하는 말하기의 단계입니다.   옛글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말하기는 진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가장 피해야 하는 말하기입니다. 교언영색은 그저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말하기와 표정을 말합니다. 말하기의 경계 1순위입니다.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말하기는 남만 속이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나를 속이는 말하기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솔직한 말하기는 쉬운 게 아닙니다. 솔직한 표현이 상처가 되는 일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이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태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비뚤어져 있으면서 말이 바로 나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듣는 이의 상태도 잘 살펴야 합니다. 나의 곧은 말이 그에게는 깊은 상처를 줍니다.     말하기의 마지막 단계는 저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칭찬여래원에서 말하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의 말하기라고 봅니다. 칭찬여래원은 여래 즉, 부처님을 칭찬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이니 얼마나 정성껏 좋은 말로 하여야 할까요? 이때 변재천녀는 부처님을 칭찬하는 역할로 나옵니다. 그야말로 온갖 아름다운 말로 부처님을 칭찬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찬탄은 변재천녀로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처님만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뭇 중생이 불성을 가진 부처라는 생각은 칭찬에 고민을 더하게 됩니다. 저런 사람까지 칭찬을 해야 한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겁니다. 그 순간이 깨달음의 ‘찰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은 상대의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입니다. 칭찬이 그대로 수행이듯이, 말하기도 그대로 깨달음이 됩니다. 말하기는 배려이고, 소통이고, 사는 기쁨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때 변재천녀 큰소리 잔소리 모두 의사소통

2024-04-07

[아름다운 우리말] 무엇을 믿기 어려운가?

종교(宗敎)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의 장면에 등장하는 ‘난신난해(難信難解)’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종교를 배우다 보면 수많은 난신난해의 장면이 나옵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옆구리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온갖 기적이 일어나고, 지옥 속에서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종종은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오히려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런 대목에서 믿음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믿음의 장면이라기보다는 표적의 장면이며, 방편의 장면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장면은 뜻밖에도 가장 쉬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도 매우 빠르고 쉽습니다. 다만 믿을 수 없기에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이해도 안 되는 겁니다. 이해에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종교의 경전마다 가장 쉽게 쓰인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까요?     불교와 기독교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의 어려움을 깨닫게 됩니다. 불교에서 난신난해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부처가 될 거라고 수기(受記)를 주는 장면입니다. 다른 어떤 경전보다도 쉬운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불성이 있으니 열심히 수행하면 부처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 같은 분이 아니라 나 같은 게 부처가 될 거라니 믿기지 않는 것이지요. 당연히 이해도 안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님께서 주신 기도문을 외우지만, 그 내용을 믿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겁니다. 예수님 정도는 되어야지 어떻게 나같이 수많은 흠결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입으로는 기도하고 있지만 기도문의 내용을 믿지 못하는 순간이 계속 찾아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믿음의 어려움은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내가 부처가 될 것을 믿는 순간 다음 단계가 곧바로 떠오릅니다. 부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말한 것은 그다음 단계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 말을 해야 합니다. ‘너도 그렇다.’ 만약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세상에서 귀하다는 말은 거짓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너도 그렇다.’라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나만 그렇다는 선언은 깨달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나 같은 게 부처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저런 게 부처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건 더 믿기 힘듭니다. 기독교의 복음성가 중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가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노래를 귀엽고, 예쁜 아이들에게 부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노래는 장애가 있거나, 고통스러운 병에 걸리고, 가난에 찌든 사람에게 부를 때 문제가 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며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래의 대상이 지독한 범죄자이면 어떨까요? 저렇게 나쁜 놈도 부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이 드는가요? 믿음이라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난신난해라는 말은 고통의 표현이 됩니다.   한편 내가 참으로 귀하다는 말, 내가 부처가 될 거라는 말,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맙습니다. 나같이 하찮은 존재가, 수많은 죄를 짓고 사는 내가 귀하다는 말씀에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믿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그 말에 오늘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눈물이 빛이 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천상천하 유아독존 예수님 정도 우리 아버지

2024-03-31

[아름다운 우리말] 온몸으로 읽다

요즘 저는 법화경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배울 게 참 많다는 생각을 하고, 동시에 배울 게 많아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말은 탁월한 진실의 언어입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종교를 넘나드는 독서는 큰 즐거움을 줍니다. 여러 종교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책에서 법화경 독송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 읽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어교육을 강의하는 사람이어서 읽기 교육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지 늘 고민입니다. 이 책은 읽기에 대한 제 눈을 밝혀주었습니다.     법화경을 읽다(카마타 시게오 지음)라는 책에서는 읽기의 종류를 네 가지로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목독(目讀)입니다. 즉, 눈으로만 읽는 겁니다. 요즘 우리의 읽기는 거의 다 목독입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본 경험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교실에서 학생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면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모두 책을 속으로 읽습니다. 눈으로만 읽으면, 시각으로 감각이 한정되어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끔이라도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두 번째 읽기 방법은 낭독(朗讀) 즉, 음독(音讀)입니다. 책에서는 입으로만 읽는 것이라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입니다. 주로 시 읽기에 사용되는 읽기 방법입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러한 읽기 방법을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입으로 읽는 것이 건성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읽는 모습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입으로만, 말로만 읽는 겁니다.   세 번째 읽기 방법으로 심독(心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독을 잘못 이해하면 마음속으로 읽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전에서도 묵독(默讀)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심독은 소리를 내서 읽되, 마음을 다하여 읽으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게 전체 논리에 맞습니다. 물론 경지에 오른 사람이 마음으로 읽는다면 소리를 낼 필요도 없어질 수는 있겠습니다. 아무튼 심독은 온 마음을 다하여 읽는 것입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책이나 철학책의 경우라면 더욱 심독을 하여야 할 겁니다.   이 책에서는 읽기의 방법으로 소개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심독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하나를 덧붙이고 있는 겁니다. 바로 색독(色讀)입니다. 여기에서 색의 의미가 어렵습니다. 색독은 다른 말로 하자면 체독(體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독에 대한 설명에도 몸[體]으로 읽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읽어야 몸으로 읽는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이 한참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독과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온 마음으로 읽는 것과 온몸으로 읽는 것은 한 쌍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몸으로 실행한다는 의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색독의 핵심은 실천에 있다는 겁니다. 색독이야말로 종교적인 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 내어 읽고, 마음 깊이 이해하였다고 하여도 실천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대승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겁니다. 법화경은 심독하고, 색독해야 합니다. 어쩌면 모든 종교의 경전은 색독하고, 체독해야 할 겁니다. 온몸으로 책을 읽었다는 말은 읽은 바를 실천하고 있다는 말, 깨달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읽기 방법 시게오 지음 전체 논리

2024-03-24

[아름다운 우리말]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법

몇 년 전에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저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는 전헌 선생님과 걸은 적이 있습니다. 걷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특히나 좋은 분과 걷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날은 그래서 더 행복했습니다. 걷는 동안 삶이 더 밝아지고, 행복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정확히는 두 군데에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큰 스피커로 쿵쿵 울려대는 신나는 음악이었고, 다른 쪽은 합창단이 부르는 고요한 노래였습니다. 합창단의 노래가 방해를 받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저희의 발길은 합창단 쪽으로 향했습니다. 저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합창단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합창 소리에 저마다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반대쪽의 음악 소리가 커질수록 합창의 소리는 더 작아졌습니다. 실제로도 더 작게 부르는 듯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더 귀 기울이며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합창 소리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노래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조용하게 노래 부르던 그 모습은 아마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거친 세상의 증거는 말소리가 커지는 겁니다.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하며 더 크게 말합니다. 소리 높여 말한다는 표현에서 소리가 감정을 북돋는 느낌을 받습니다. 친구와 대화에서도 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심지어 가족 간의 대화에서도 목소리는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 싸우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스스로는 싸우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벌써 우리의 마음속은 싸움이 일어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할 때 소리를 치는 것은 두 사람이 이미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 우리 사이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표현을 씁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다가간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기울고, 어깨가 다가갑니다. 소리가 커지면 다가갈 리 없습니다. 거리를 두게 되죠. 당연히 귀 기울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리가 작고 부드러워야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를 사람들이 잊고 산다고 봅니다. 자신의 주장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떠들어 대면 소음이 됩니다. 떠든다는 말도 소리가 ‘뜨고, 들려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라앉지 않은 겁니다. 차분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수다는 떤다고 합니다. 이 말도 재미있습니다. 떠드는 것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있습니다.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떨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떨리는 것은 파동을 보입니다. 서로에게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수다야말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다가 곧 위로이기도 합니다. 같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떠는 정도는 괜찮은데 떠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비법은 소리를 작게 내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수록 나에게 다가올 겁니다. 두 사람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내 말이 듣고 싶도록 내용을 충실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기껏 들었는데 알맹이가 없으면 허무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합창 소리 음악 소리 합창단 주변

2024-03-17

[아름다운 우리말] 겸선(兼善)하다는 말

비슷한 부류의 단어이지만 어떤 단어는 왠지 더 많이 쓰이고, 어떤 단어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단어의 선택에도 언중의 선호도가 있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독선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는 편이지만, 겸선이라는 단어는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글에서는 겸선이라는 단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겸선하다’라는 말을 자주 쓸 것을 권합니다.   저는 독선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경계를 합니다. 독선이라는 말은 내가 착한 것이 아니라 나만이 착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착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라도 착하니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악으로 취급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과는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독선적이라는 말만큼 꽉 막힌 말이 없는 듯합니다. 독선적인 사람과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상대편일 수도 있지만, 나일 수도 있다는 점이 늘 경계를 하게 합니다. 독선적인 사람의 공통점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독선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너그럽고, 치우치지 않는데 상대가 이기적이어서 문제라고 말하는 겁니다. 늘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상대를 평가하는 나의 자세를 봅니다. 그런데 독선이라는 말은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선에도 귀한 뜻이 있습니다. 이 뜻은 맹자에 나옵니다. 맹자 진심장(盡心章)에는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려울 때는 혼자서 몸을 선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세상에 나아가게 되면 천하가 함께 선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독선의 참 의미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면 나쁜 독선입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면 좋은 독선이 되는 겁니다. 좋은 독선은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간다는 ‘신독(愼獨)’으로 옮겨갑니다. 아니 거꾸로 신독이 곧 독선일 수 있겠습니다. 혼자의 시간은 때로 고독하지만, 때로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독선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수행해서 독선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겸선(兼善)’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른 분의 해석을 보면 겸선 부분을 슬쩍 지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잘 되면 천하를 좋게 만든다는 해석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겸선은 나만 좋아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겸선하다’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 말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감화하여 착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나만 착하면 안 됩니다. 주변도 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게 좋은 세상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겸선하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좀 아쉽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독선은 두 의미 중에서 나쁜 의미만 남아있고, 겸선이라는말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왜 이런 말은 살아남지 않을까요? 저는 적극적으로 겸선하다와 같은 말을 사용하였으면 합니다. 살려냈으면 합니다.   다시 마음속으로 단어의 뜻을 새깁니다. 나 혼자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은 멀리하고 싶습니다. 힘들고,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는 혼자서 선함을 수행하는 독선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잘되어갈 때는 나만을 위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함께하는 겸선을 하기 바랍니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겸선하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맹자 진심장 우리 생활

2024-03-10

[아름다운 우리말] 소리를 내다

우리말 소리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자연의 소리부터 마음의 소리까지 다양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위로가 됩니다. 물론 심한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하죠. 우리는 때로 소리를 듣기 위해서 바다에 가고, 산에 가고, 숲길을 걷습니다. 소리 없는 자연은 무척 어색하고 답답할 겁니다. 제가 대학 때 썼던 시의 제목이 ‘소리하는 바다’였음이 문득 떠올라 미소 짓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바닷소리가 듣고 싶다고 1박 2일 가출을 했을 때 쓴 글이었습니다. 젊은 낭만입니다.   소리는 말과도 통합니다. 소리에 뜻이 더해지면 말이 됩니다. 말소리는 소리이면서 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좋지만, 말이 소리가 될 때는 문제가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로 말이 아닌 말을 소리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헛소리입니다. 헛소리는 분명히 말이지만 말로 생각하지 않기에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잔소리, 큰소리, 흰소리도 거기에 속합니다. 우리말의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표현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말 같은 소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소리는 말에서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노랫소리라는 말은 노래가 곧 소리임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제일 듣고 싶은 소리가 노랫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옛 노래에 아예 판소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소리가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였고, 노래를 부른다는 말 대신 소리를 한자리 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노래는 ‘놀다’에서 온 말로 유희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는 내 몸통을 악기로 하여 나오기에 가장 솔직하고, 맑은 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내 몸통과 성대, 입과 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 머리끝에서까지 소리가 나옵니다. 소리에 우리는 내 감정을 담고, 내 떨림을 담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는 게 훨씬 정겹고,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말을 하는 사람은 좋은 소리를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몸통이 내는 소리를 종종 죽여 놓고 삽니다. 소리를 죽인다고 하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곧 사람이기도 합니다. 말하고, 노래하는 소리의 사람입니다. 그런 소리를 죽이면 사람의 기운도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물론 소리 죽여 걸어야 하거나,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운 없는 소리가 아니라 따뜻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리를 크게 내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때조차 소리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소리를 통한 기운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백번 되풀이하여 읽으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모르면 되풀이하여 읽기를 권합니다.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뜻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바로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입니다. 소리를 내어 읽어야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는 겁니다. 큰소리로 읽어야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겁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글쓰기 수업은 필연적으로 글 읽기와 연계가 됩니다. 대학생 수업이기에 눈으로 읽기를 예상하겠지만, 제 수업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를 같이 합니다. 학생들도 오랜만에 해보는 경험이랍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합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뜻도 저 잘 알게 되고, 부수적으로는 기분도 좋아집니다. 이런 것을 언어화라고 합니다. 언어화는 내 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내보이는 것입니다. 내 사고를 뚜렷이 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 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잔소리 큰소리 대신 소리

2024-03-03

[아름다운 우리말] 고통과 기쁨

불교에서 깨달음의 길로 ‘사성제(四聖諦)’를 이야기합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가 바로 그것입니다. 삶에서 고통이 쌓이면 고통을 없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이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법화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사성제를 다시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지만 내 상태에 따라 공부의 깨달음은 달리 다가옵니다. 이번에 사정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성제의 고(苦)는 다시 사고팔고(四苦八苦)로 나뉩니다. 우리의 고통을 네 가지 혹은 여덟 가지로 나누는 것입니다. 네 가지 고통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이고 여덟 가지 고통은 여기에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를 듭니다. 팔고에 해당하는 네 가지 고통을 보면서 금방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원증회고와 애별리고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고통인 원증회고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입니다.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나 삶의 대부분의 고통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에 만나고 싶은 사람만 있다면 하루하루가 천국입니다. 기독교에서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우리들 사이에 천국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지위가 올라가고 세상과 넓게 만나다보면 정도는 다를지 모르나 원증회고의 세상입니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애별리고는 애당초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별의 고통도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별의 고통은 상존(常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할 수는 없는 겁니다. 특히 외국에 사는 사람이나 외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애별리고의 고통은 항상 느끼는 일입니다. 또한 애별리고의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의 이별이니 언젠가는 다가오는 일입니다.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증회고와 애별리고의 두 고통을 보면서 저는 회(會)와 별리(別離)를 바꾸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기쁨과 싫은 사람과 헤어지는 기쁨으로 말입니다. 물론 싫은 이가 적어서 싫은 이와 헤어지는 기쁨마저 적어진다면 더 좋겠지요. 싫은 이를 줄이는 노력, 사랑하는 사람을 늘리는 노력은 중요한 수행입니다.   옛이야기에 소금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소금장수 아들을 걱정하고, 햇볕 쨍쨍한 날에는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엄마의 마음일 겁니다. 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 오는 날에는 우산장수 아들 때문에 웃음이 나고, 맑은 날에 소금장수 아들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기 바랍니다. 같은 사건이어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고통을 줄이고 기쁨이 커지는 겁니다.   허나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저는 싫은 사람 만나는 일을 날마다 걱정합니다. 또한 저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에 슬퍼하고, 잘된 자식보다 힘든 아이에 온통 마음이 쓰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사실 아픈 손가락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게 부모입니다. 아픈 아이가 있는데 잘된 아이 때문에 기뻐할 수만은 없겠지요.   고통이 많기는 하지만 그게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고통이 많기 때문에 반대로 기쁨도 많아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파하고 기뻐하는 인간이라는 게 싫지만은 않습니다. 고통과 기쁨은 인간의 두 모습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고통 기쁨 가지 고통 우산장수 아들 소금장수 아들

2024-02-25

[아름다운 우리말] 불안과 설렘 사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내 몸의 세포 하나부터 나를 둘러싼 환경 하나하나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말만큼 많은 해석을 낳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 변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허무함을 줍니다. 젊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합니다. 언제나 젊고, 언제나 뜨거울 수는 없습니다.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상대를 바라보고, 세상을 지켜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는 변화와 일정하지 않은 세상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도 그런 개념일 겁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불안과 초조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설렘과 기대라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사건이라고 하여도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그 일을 그만두는 것도 모두 그렇습니다. 나의 감정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정과 긍정은 그야말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붙어있는 감정입니다. 부정에서 고개만 돌리면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강화되는 것에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의 영향도 있습니다. 부정적 경험이 걱정이라는 감정이 되어 나를 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아주 적절한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입니다. 자라에게 물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라와 비슷한 솥뚜껑에도 놀라는 것입니다. 자라와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 솥뚜껑이 두려울 리가 없습니다. 자라 생각만 해도 신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솥뚜껑도 반갑고 말입니다. 긍정적인 경험이 많은 경우에는 불안이 설렘으로 바뀝니다. 또 좋은 일이 있을 거로 기대하는 겁니다.     삶에서 불안은 줄어들고 설렘이 많아지기를 바란다면 부정의 기억을 긍정의 기억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힘들었던 일도 돌이켜보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에는 모든 것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긍정적인 일만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도 모두 현재의 내가 되었고, 내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건 분명한 진실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고, 이를 되풀이하여 생각하면, 부정적 사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게 더 무서운 일입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은 좋으나 트라우마를 계속 반복하여 헤집는 것은 더 깊은 수렁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헤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나를 빨아들이는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어둡고 컴컴해져서 무섭고, 불안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하여 더 힘이 듭니다. 부정적 경험보다 무서운 것은 부정의 기억입니다.   긍정심리학에서는 이런 경우에 긍정적인 사고를 하도록 유도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만큼 부정적 감정은 줄어든다고 합니다. 감정의 총량이 있어서 억지로 하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즉, 힘들고 불안할 때는 긍정의 표현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입니다. 단지 긍정적 표현을 떠올리고, 입 밖으로 내었을 뿐인데, 부정적 감정은 저만치 달아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였을 겁니다. 신께 의지하고, 부처께 귀의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고, 힘이 났던 겁니다.   새해가 되고, 새 학기가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곳에 여행을 떠날 때도 우리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부정의 감정에 물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정의 감정에 계속 물을 주면 부정의 꽃이 필 수밖에 없습니다. 긍정의 감정에 뿌리부터 여러 번 물을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잘 될 거야. 그동안 그랬듯이 힘든 일이 있어도 끝내 모든 것은 다 도움이 되었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좋은 일도 많아.’ 가슴 설레는 오늘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불안 부정적 감정 부정적 경험 부정적 사고

2024-02-18

[아름다운 우리말] 형용사 명령형

다른 언어와 구별되는 우리말의 특징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높임법의 발달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높임법’의 발달입니다. 즉,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하는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하는 말과 어른에게 하는 말,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말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하는 말, 윗사람에게 하는 말과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 공식적인 말과 비공식적인 말은 다 다릅니다. 이렇게 상대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언어는 거의 없습니다. 특징이라고 할 만합니다.   의태어의 발달도 특이한 점입니다. 모양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 발달한 언어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는 많은 언어에 있습니다만, 의태어의 발달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걷는 모습만 해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아장아장, 어슬렁어슬렁, 터벅터벅, 성큼성큼, 뚜벅뚜벅, 어기적어기적, 살금살금, 슬금슬금 등 당장 떠오르는 말만 해도 많습니다. 의태어는 변화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의태어는 단순히 흉내 내는 말이라기보다는 ‘묘사’하는 말입니다.   변화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생긴 또 다른 우리말의 특성은 바로 형용사의 발달입니다. 형용사는 기본적으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항상 그대로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 바뀝니다. 대표적인 것이 색깔이지요. 색깔은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에 따라, 바람에 따라, 빛에 따라, 내 마음에 따라 조금씩 변해 갑니다. 어제의 색이 오늘의 색이 아니고, 오늘의 색이 내일의 색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엄청나게 발달합니다. 붉다, 빨갛다, 뻘겋다, 붉으스레하다, 발그레하다, 붉으죽죽하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등 금방 떠오르는 표현도 많습니다. 노랗다도 마찬가지죠. 누르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노릇노릇하다, 누리끼리하다, 샛노랗다, 싯누렇다 등 단어가 줄을 잇습니다.   그런데 단어의 모양으로만 보면 우리말은 형용사가 동사와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다와 좋다, 공부하다와 조용하다’를 보세요. 영어나 일본어는 동사와 형용사의 구별이 형태나 문법으로도 명확합니다. 의미까지 따지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형태로는 구별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의미로도 혼동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구별 방법을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구별법이 형용사에는 관형사형 어미인 ‘-는’을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조용하다와공부하다의 경우 둘 다 같은 품사로 보이지만 공부하다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반면, 조용하다는 ‘조용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조용하다는 형용사인 겁니다. 깨끗하다, 맑다 등을 생각해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형용사는 주로 명령형이 안 된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보통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명령에 쓰기가 어렵습니다. 명령은 주로 동작에 쓰입니다. ‘가다 - 가라, 먹다 - 먹어라, 공부하다 - 공부해라’처럼 동사는 명령이 쉽습니다. 그런데 형용사 중에도 명령이 가능한 경우가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분명 상태이지만 그 상태를 화자가 좋아하면 명령이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언급한 조용하다의 경우도 ‘조용해라’라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물론 ‘조용히 해라’가 더 자연스러울 수는 있겠습니다.   형용사의 명령형이 자주 쓰이는 장면은 그래서 기원을 하는 경우입니다. 상대에 대한 나의 기원을 표할 때는 자연스럽게 형용사에 명령형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최근 들어 더 늘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 ‘행복하다’는 형용사입니다. 당연히 ‘행복하는’이라는 표현은 어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세요.’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건강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기 바랍니다.’가 더 자연스러울 수 있겠지만 요즘은 ‘건강하세요.’라는 명령형도 자주 쓰입니다. 이렇듯 명령이 아니라 기원을 담은 형용사가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형용사 명령형 형용사 명령형 형용사가 동사 구별 방법

2024-02-11

[아름다운 우리말] 일손 부족과 학생 부족의 해결책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출생률의 저하에서 비롯된 일손 부족과 학생 부족은 수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해결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일손의 경우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대학의 학생 부족은 외국인 유학생의 유치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모두 답답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제안입니다. 제안이 해결책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전문가가 함께 연구를 깊게 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저는 예전에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의 자문위원과 한국어교육기관 대표자협의회 회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주로 유학생의 유치와 이탈에 관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손 부족 문제와 대학의 학생 부족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즉, 이 두 가지 문제를 연계하는 발상을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여 지방대학이나 전문대학을 살리고, 이렇게 유치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어학연수를 오고, 학부에 들어간 학생이 이탈하는 이유는 대부분 취업 문제입니다. 돈을 벌어서 한국에 올 때 들었던 돈도 갚아야 하고, 본국의 가족에게 돈도 보내주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가 불법이거나 졸업 후 한국 내의 취업이 어렵다면 불법적인 방법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뉴스의 인터뷰를 봐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외국인 학생이 졸업 후 돌아가는 것에 대한 학생과 고용자의 걱정이 많습니다.   저는 외국인 학생이 한국어 연수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취업을 지원해 주는 것이 이탈을 방지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전공과 연계되는 취업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일본어를 공부할 때, 저와 같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은 대부분 요양 보호를 전공하려고 온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어를 우선 배운 후에 요양 보호 관련 전문학교에 다니고, 요양원에서 실습하고, 취업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요양원이나 국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선순환적인 연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방법은 한국어를 세계 속에 제대로 보급하는 방법도 됩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어를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귀국 후에도 한국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바탕도 마련될 것입니다. 한국어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는 생각보다 큽니다.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한국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국어 능력 부족이 차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대학의 전공교육과 연계하면 전문대학이나 학생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일반대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전공을 더 많이 만들고, 때로는 복수전공을 하게 하여, 귀국 후 하고 싶은 일에 관한 전공도 공부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농촌에 일손이 부족하면 대학에 농업 관련 학과가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단순한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는 복수전공을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전공과 연계하여 취업하게 되면 전문성의 부족에 따른 위험성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졸업 후에 명확히 취업이 보장되고, 학기 중에는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아르바이트가 보장되고, 방학 등을 활용해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불법 취업이나 체류는 감소할 것입니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지역사회에 활력을 주게 될 겁니다. 지역 경제 발전에도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중요한 이점입니다. 한국어 교육기관, 대학, 일손 부족의 사회, 지역 경제 등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순환적 외국인 유치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 역시 외국인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상호문화적으로 발전하는 시민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해결책 일손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학생 한국어교육기관 대표자협의회

2024-02-04

[아름다운 우리말] 반대말과 상대어

반대말과 상대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어떻게 설명이 되어 있을까요? 놀랍게도 반대말과 상대어는 설명이 같습니다. 『명사』 『언어』 그 뜻이 서로 정반대되는 관계에 있는 말. 한 쌍의 말 사이에 서로 공통되는 의미 요소가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한 개의 의미 요소가 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 ‘총각’과 ‘처녀’, ‘위’와 ‘아래’, ’작다’와 ‘크다’, ‘오다’와 ‘가다’ 따위이다. 이러한 설명은 반대어나 반의어도 같게 나옵니다. 사전이 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와 상대는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반대라는 말과 ‘반대가 되는 말’은 찬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로 양극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편과 상대편도 같은 뜻도 아닙니다. 따라서 반대말과 상대어를 설명할 때는 좀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있다와 없다는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도 분명히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도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편 서로 짝을 이루면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은 주로 상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상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반대로 보는 사회는 수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자유가 있으면 평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이루려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자유로운 사회는 불평등한 게 당연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남과 여도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반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짝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기에 상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녀를 반대의 개념으로 보는 순간 많은 차별이 일어납니다. 아들과 딸, 아버지와 아들은 반대말이 아닙니다.   반대말이나 상대어를 국어학에서는 주로 반의어라고 합니다. 반의어는 이러한 두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의어는 양극이 있는 반의어가 있고 중간과 단계가 있는 반의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은 양극의 반의어입니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농담처럼 반죽음이라고 표현하기는 합니다만, 이것도 살아있는 겁니다.     한편 희다와 검다는 수많은 중간이 있습니다. 회색을 중간처럼 이야기하지만 회색만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피하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와 좌의 사이에도 수많은 중간이 있습니다. 지나친 우를 극우라고 하고, 지나친 좌를 극좌라고 합니다. 치우쳐 있기에 피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불교에서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양극을 피한 자리가 중도입니다. 그래서 종종 중도는 조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반대말, 상대어, 반의어를 공부하면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고정관념을 만납니다. 어쩌면 모든 반대는 모두 다 상대일 수 있습니다. 반대라고 생각했던 표현들에 상대의 개념을 붙여보세요. 그러면 모든 게 조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있다의 반대말인 없다도 상대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세요. 삶의 반대인 죽음도 상대의 개념으로 바라보세요.     그것을 깨닫는 게 중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되는 쪽이 아니라 상대를 만나면 조화롭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반대는 경쟁이나 부딪침이 연상된다면, 상대에는 타협과 어울림이 연상됩니다. 상대에게 쓸 수 있는 개념은 나와 다르다는 것이라면, 반대에는 틀린다는 개념이 생성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를 볼 때는 수많은 중간을 보게 됩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종교와 철학에서 중도와 중용이 중요한 이유일 겁니다. 중도와 중용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힘은 반대라는 관점을 상대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요즘 세상은 그야말로 반대투성이입니다. 따뜻한 어울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대말 상대어 반대말 상대어 의미 요소

2024-01-28

[아름다운 우리말] 창간호의 마력

누구나 애착이 가거나 왠지 짠한 물건이 있을 겁니다. 인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부터 어릴 적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까지 저마다 기억의 물건이 다릅니다. 저에게는 문예지나 학술지의 창간호가 그렇습니다. 논문집이든 문학지든 간에 창간호, 1집을 보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창간호를 만들면서 느꼈을 설렘이나 환호, 또는 애태움이나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왠지 창간호는 정성을 모아 만든 것이기에 좋은 기운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간호를 보이는 대로 사서 모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저는 헌책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새 책도 많이 삽니다. 헌책이 매력적인 것은 우선 희귀성에 있습니다. 많이 남아있지 않기에 저만 소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몇 권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연구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저만 소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소중한 책은 아닐지 모릅니다만 제 눈에는 귀한 책일 수 있습니다. 헌책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하고, 메모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가끔은 책갈피가 남아있기도 하고, 그 책을 준 저자의 글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메모가 남아있는 책이 더 귀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헌책도 새 책처럼 깨끗한 경우에 인기가 높고 가치를 높게 칩니다. 제 책은 헌책으로 팔아도 값어치가 높지 않겠네요. 저는 책에 메모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헌책 중에서도 초판본은 비싼 경우가 많습니다. 희귀해서일 수도 있고, 처음 나왔다는 상징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초판본은 저자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초판을 출판사로부터 분명 받았겠지만 재판, 3판이 나오면 초판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 경우에도 제가 쓴 초판을 제가 갖고 있지 않기도 있습니다. 나중에 초판을 구하러 다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헌책방에서 자신의 책을 찾으면 그 기분도 묘합니다.   유명한 책과는 달리 학술지의 창간호, 1집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오래된 학회에서 창간호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학회가 안정이 안 되었을 무렵에 창간호를 만들기에 펴낸 부수도 많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어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의 학과에서 만든 학술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마저 적어서 창간호는 귀한 대접을 못 받습니다. 때로는 학과에서 펴낸 학술지는 창간호가 마지막 호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엄청 의미 있는 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창간호를 만들던 사람의 손길과 눈빛을 기억합니다. 그 정성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창간호를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창간호를 열심히 모으다 보니 뜻밖의 즐거움도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풋풋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시도 그렇고, 논문도 그렇습니다. 지금 보면 얼굴이 뜨거워질 수도 있고, 아련한 추억에 잠길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창간호는 저에게 일종의 부적과도 같습니다. 첫 마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마력의 부적입니다. 저도 제가 공부하던 시절의 기억, 글을 쓰던 시간의 기억을 창간호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전에 학과에서 ‘봄햇살’이라는 학술지를 만든다고 하여 논문을 실었는데 그 책이 2호까지만 나오고 폐간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일입니다. 다른 학술지에 실었으면 검색이 될 텐데, 2호까지밖에 안 나온 학술지여서 검색도 되지 않습니다. 제 글이 담긴 봄햇살 창간호를 다시 꺼내봅니다. 추억이 아련합니다. 짠하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창간호 마력 봄햇살 창간호 창간호 1집 사실 초판본

2024-01-21

[아름다운 우리말] 은혜를 갚는 나라

한국이 해방 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말도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전혀 다른 접근도 가능합니다. 무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선 한국은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나라가 아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조선시대를 암흑기처럼 표현하는 학자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의 학문적 수준은 그야말로 세계적이었습니다. 퇴계, 율곡, 다산의 학문적 세계는 오히려 중국을 앞설 정도였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친 문화의 수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불교의 수준, 공예나 인쇄술의 수준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우리를 스스로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무시하는 겁니다.   또한 무(無)라는 표현에서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의 도움 없이 홀로 발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많은 나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말부터 우리가 받은 도움은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의 주요 사립학교는 외국의 도움으로 지어진 곳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요 대학을 살펴보세요. 많은 병원도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현재에는 다른 나라의 도움이 큽니다. 전쟁 이후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 나라도 많습니다. 특히 미국의 도움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합쳐지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도움을 받던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선진국의 도움을 받던 최빈국이 도움을 주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던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자랑스럽겠죠.   그런데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불편합니다. 자기 입으로 남에게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하는 게 과연 좋은 태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누구를 돕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가벼운 느낌입니다. 돕는 것은 모두에게 알리며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가슴에 있어서 그럴 겁니다. 그래서 저는 도움을 받던 나라가 은혜를 갚는 나라가 되었다고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현 하나만 바꾸어도 태도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나쁜 것은 은혜를 갚으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전쟁 때 한국을 돕기 위해서 참전했던 나라를 생각해 보면 그런 마음이 더 깊이 듭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 이외에도 비교적 어려운 나라들도 참전 16개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태국, 뉴질랜드, 콜롬비아,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그리스, 터키, 룩셈부르크, 필리핀,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참전국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한반도에서 목숨을 바친 나라들입니다.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정말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으로 은혜를 갚기 바랍니다. 도와준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기 바랍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도움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은혜를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움을 준 나라에만 갚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어려운 곳을 도와 그들도 또 은혜를 갚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은혜에 고마워하고 갚아간다면 세상은 한결 나아질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은혜 나라 나라 사람 학문적 수준 학문적 세계

2024-01-14

[아름다운 우리말] 무엇을 배우고 있나

202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2024년입니다. 갑진년이라는 말도 한참 동안 들릴 겁니다. 용띠라는 말도 들리겠죠. 한동안은 올해와 작년이 헷갈릴 겁니다. 연도도 헷갈리고 나이도 헷갈릴 겁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옵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지난해를 돌아보았습니다. 즐겁게 공부하고, 배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學者)라는 말은 참 좋습니다. 학자는 늘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저는 교수(敎授)라는 말보다는 학자라는 말이 좋습니다. 늘 배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작년을 돌아보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매주 공부하는 모임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수요언어문화교육 연구모임을 온라인으로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7개국(미얀마, 태국, 베트남, 중국, 일본, 미국, 한국)에서 참여하는 수요 모임은 이제 연구의 모습이 자리잡히는 듯합니다. 올해 수요 모임 선생들은 20편의 논문을 등재학술지에 게재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나누는 것은 기쁨입니다. 또한 두 권의 저서와 두 권의 번역서도 출간하였습니다. 저서는 청소년 우수도서와 세종도서에 각각 선정되었습니다.   앞으로 수요 모임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언어교육과 치유’의 문제, ‘상호문화교육과 시민교육’의 문제, ‘북한의 조선어교육’ 문제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질 겁니다. 저는 우리 모임이 언어교육의 미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 시대에 언어교육은 치유여야 합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기쁘고, 마음에 힐링이 되기 바랍니다. 또한 문화교육은 서로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시민교육이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조선어교육은 장막 속에 가려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더 잘 알고 소통해야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하는 외국인을 위한 조선어교육을 연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더 공부가 재미있기 바라고, 더 즐거운 성과가 있기 바랍니다.     저는 월요일에는 옛글 읽기 모임을, 금요일에는 한문공부를 하였습니다. 월요일에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인 ‘월인석보’와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예수셩교젼서’는 옛말뿐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 공부도 되었습니다. 금요일에 박재양 선생님과 둘이서 공부하는 한문공부에서는‘갑골문’, ‘천자문’, ‘맹자’를 일본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한자의 기원과 한문 공부, 고전 공부를 통해서 사람을 배웁니다. 사실 언어 공부는 사람 공부이고 그대로 인간학입니다. 일본어와 한문 공부가 깊어지기 바라고, 저도 깊고 넓어지기 바랍니다. 배울수록 그릇이 커지고 남을 더 받아들이게 됩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세 시간 동안 고경자 선생님께 배우는 국악은 ‘국악치유 연구’와 이어집니다. 아내와 둘이 배우고 있는데,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민요, 사물놀이, 춤을 배우면서 한국문화와 치유를 느낍니다. 월 1회 요양원에 국악치유 공연을 갑니다. 공연은 하는 사람,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이 모두 치유되는 시간입니다. ‘판굿, 아리랑, 회심곡, 사랑가’ 등과 치유에 대한 논문을 고경자 선생님과 썼습니다. 저는 논문도 치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류시화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나?’라는 질문이 담긴 글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묻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배우고 깨달았는지. 날마다 배울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는 것이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함께 배우면 더 좋고, 이왕이면 배운 것을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 2024년도 기쁘게 배우고,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즐겁게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고 계신가요? 오늘은 무엇을 배웠나요? 즐겁게 배우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수요언어문화교육 연구모임 국악치유 연구 한문 공부

2024-01-07

[아름다운 우리말] 새날이 밝아온다

해는 날마다 뜹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낀 날에도 해는 어김없이 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해를 보지 못하여, 해가 안 뜬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해는 이렇게 매일 뜨지만 새해가 되면 왠지 설레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묘한 일입니다. 시간은 이어져 있지만 우리는 분절하여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이어져 있지만, 심리적인 시간, 인문학적인 시간은 분리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불면의 밤이 긴 사람에게 해 뜨는 새날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면 날이 밝는 게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해가 뜬다,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는 말에서 저는 하얀 커튼이 떠오르고 아픈 하루가 떠오릅니다. 어떤 이는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어떤 이는 새벽에 잠을 못 이룹니다. 아침형 인간이나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저 아침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일찍 일어났기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침형 인간보다는 아침에 푹 자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나, 낮에 즐겁게 활동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심리학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에 놀랐습니다. 인간의 뇌에는 한계가 있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로 뇌는 단순해서 현재 마음의 상태가 긍정적이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어휘를 되풀이하면 자신의 몸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일부러 웃고, 좋은 말을 떠올리면 몸도 좋아지는 겁니다. 긍정적인 표현 몇 가지를 기억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불안도 스트레스도 줄고, 좌절이나 우울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불안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전보다 밝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긍정의 힘이죠. 웃으면 복이 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수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업에서는 수많은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 어휘나 표현을 더 많이 소개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활동이나 과제를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세상을 즐겁게 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생에게만 영향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나도 몰래 가르치는 사이에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즐겁지 않은데도 즐거운 듯이 말을 했더니 즐거워졌습니다. 그러한 습관 속에서 어느새 나는 즐거운 사람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나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워집니다. 내가 웃으니 그도 웃습니다. 웃음도, 기쁨도, 즐거움도 전염력이 큽니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薺家治國平天下)입니다. 내가 긍정적이고 즐겁게 살면 가정이 바뀌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시작점은 나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세상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등등 좋은 단어가 참 많습니다. 이런 표현을 떠올리면서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행복하고 기쁜 순간, 즐거운 만남을 떠올려 보세요. ‘다시 해보자, 어차피 지나간 일이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를 걱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등등 내게 힘을 주는 표현도 많습니다. 자신을 일으키는 단어와 표현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납니다. 때로는 좋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일찍 깨어 한없이 가라앉은 새벽에 긍정의 어휘와 표현을 말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냥 해 본 것이었을지 모르나, 후에는 내 삶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진짜로 새날이 기쁘게 밝아올 겁니다.     모두에게 올 한 해 늘 기쁜 해가 뜨기 바랍니다.     새날이 밝아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새날 시간 인문학적인 아침형 인간 불안 정도

2024-01-01

[아름다운 우리말] 용이 나타났다

용의 순우리말은 무엇일까? 용의 순우리말은 미르이다. 여기저기에서 미르를 상표로 쓰거나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있어서 미르에 익숙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르가 나타나는 문헌들은 많지만 천자문에 보면 명확히 등장한다. 광주천자문에는 미르 진(辰)/ 미ㄹ·룡(光州千字文)으로 나오고, 한석봉의 천자문에는 미르룡(石峰千字文)으로 나온다. 옛 천자문에 귀한 자료가 많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작제건(作帝建)과 용녀(龍女)의 소생인 용건(龍建)의 아들이었다. 작제건, 용건, 왕건으로 내려오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용녀, 용건으로 내려오는 것은 용족임을 의미한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나 후백제의 견훤도 용의 후손으로 일컫는다.   용은 주로 물을 의미한다. 용왕이 사는 곳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문무왕은 사후에 호국룡이 되겠다고 하여 동해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낸다. 바다의 왕이 되는 것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고, 출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이 상징하는 것과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등용문의 이야기도 상징에 기반을 둔 이야기다.     서양의 용은 주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로 퇴치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똑같이 용을 상상하더라도 상징이 주는 상상의 결과는 전혀 다르다. 꿈에 나타났다면 어떨까? 동양이라면 좋은 징조이고, 훌륭한 자선이 나올 징조이겠지만, 서양이라면 기분 나쁜 악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빅뱅의 권지용 씨, 즉 지드래곤은 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서양에서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처음 서양 사람들이 지드래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에는 권지용 씨와 마찬가지로 용이 들어가는 이름이 많다. 주로는 남자의 이름에 들어가는데 이는 용이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에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용이 이름에 들어가는 것은 태몽과도 관련이 있다. 꿈에 용을 보면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서, 율곡 이이(李珥)를 낳았고 그리하여 어릴 때 이름이 현룡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야기가 길었다. 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이다. 청룡의 해라고 말도 많다. 용은 다양한 능력을 갖춘 상상 속의 동물이다. 그리고 용은 나라를 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용은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져서 가뭄이나 홍수를 막아줄 것이다. 그러기 바란다. 한 해 나라의 운도 올라가고, 어려운 사람이 줄고, 어질게 세상을 이끄는 좋은 지도자가 많아지기 바란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실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용이 들어갔다. 용이 나타났다는 의미로 현(顯)이 함께 쓰였다. 늘 이름의 무게가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한다.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상징적 의미 용건 왕건 용의 순우리말

2023-12-25

[아름다운 우리말] 반말은 무척 어렵다

한국어는 높임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중에서도 상대높임법, 즉 청자높임법이 발달하였습니다. 상대높임법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높임의 등급을 달리하는 겁니다. 상대높임법이 발달한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바어 정도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이 아니라면, 한국어가 모어가 아니라면 상대높임법은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뜻밖에도 반말이 높임 표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주로 종결어미에 의해서 상대 높임이 실현됩니다. 상대 높임의 등급은 학교문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격식체 4단계, 비격식체 2단계로 나눕니다. 이 중에서 격식체의 ‘하게체’와 ‘하오체’의 사용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게체의 경우는 장인과 장모의 말투나 나이 든 교수의 말투에 조금 남아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하오체의 경우는 문서에 ‘하시오’라고 남아있거나 사극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재외동포나 외국인의 경우에는 주로 격식체 2단계 즉 ‘합쇼체’와 ‘해라체’, 비격식체 2단계 즉 ‘해요체’와 ‘해체’만을 학습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주 높임 단계인 ‘하십시오체’와 두루높임 단계인 ‘해요체’는 높임으로 볼 수 있고, 아주낮춤인 ‘해라체’와 두루낮춤인 ‘해체’는 낮춤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낮춤을 반말이라고 합니다. 반말은 반말 말하는 짧은 투의 말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또한 아주 낮추지 않고, 반만 낮추는 일종의 높임이라는 기원도 있습니다. 보통 하게체나 하오체가 주로 이런 의미의 반말에 속합니다. 듣는 이를 낮추지 않으려고 쓰는 말투라는 의미입니다. 사위나 나이가 찬 제자에게 쓰는 말투입니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학습자에게 높임법의 사용에 대해서 질문하면 높임 표현에 대해서 아주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높임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겁니다. 그런데 반말 사용에 대하여 질문하면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적다는 대답이 많습니다. 이는 재외동포 아이들과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외동포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 반말이 자유롭습니다. 특히 해요체는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집 밖을 나가는 순간 반말은 아주 어려운 말이 됩니다. 한국어 사용의 실수는 주로 반말 사용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 높임 표현보다는 어쩌면 낮추는 표현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말의 상대높임법은 단순히 나이와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나이뿐 아니라 지위와도 관련이 되고, 친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나이는 아래지만 나보다 지위가 높은 경우에 반말은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괴로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하면 큰일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질풍노도의 중고등학생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어에서 높임과 낮춤의 복잡함은 한국어 학습자에게 반말 사용이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외국인의 경우는 이러한 반말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을 꺼립니다. 실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상대나 심지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낮춤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한국인, 외국인, 재외동포의 반말 사용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편 반말이 꼭 나쁜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저는 종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불편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경우에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로 평상시에 반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하면 화가 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혼낼 때, 부부가 화가 났을 때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적절한 존댓말과 반말이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관계가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말 존댓말과 반말 반말 사용 한국어 사용

2023-12-17

[아름다운 우리말] 나의 사전이 없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불가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순진하게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사전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종이사전이 집에 없는 사람이 많고, 자기 사전이 없는 사람은 아마 대부분일 겁니다. 특히 사전이 있다고 해도 외국어 사전일 가능성이 많고, 국어사전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어사전이 있다고 해도 보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요. 인터넷으로 손쉽게 어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사전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릴 때 저는 사전을 좋아했습니다. 사전에 있는 낱말의 설명이 재미있었고, 사전을 빨리 찾는 게 신이 났습니다. 사전 빨리 찾기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동생들과 집에서 서로 어휘를 부르면 몇 번에 어휘를 찾는가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사전 찾기 순서를 잘 알아야 하고, 어떤 어휘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저는 그때 사전을 펼쳐서 한 번에 어휘를 찾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사전을 많이 봤다는 의미일 겁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실력이 안 될 것 같습니다.     20대에 미국에서 1년 정도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빌딩을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청소가 힘들지 않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은 그때의 경험 덕분일 겁니다. 사무실을 청소하면서 놀란 것은 책상 위에 사전이 놓인 곳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영어가 어휘도 많고, 비슷한 말이 많아서 사전을 찾는 것이 우리보다는 더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을 가까이 두고 늘 보면서 편지를 쓰고, 문서를 만드는 모습은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요즘 저와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은 사전이 많습니다. 대략 500권 정도 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500권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사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국어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갈래사전이나 분류사전도 있고, 방언사전과 어원 사전, 고어 사전, 이두 사전도 여러 종류 있습니다. 문법 사전도 있고, 동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 속담 사전, 고사성어 사전 등도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외국어 사전도 있습니다. 영어, 일어, 한자 사전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좀 특이한 사전도 눈에 띕니다. 전에 샀던 드라비다어 사전, 아이누어 사전, 산스크리트어 사전, 라틴어 사전, 만주어 사전, 몽골어 사전 등이 보입니다. 시어 사전, 한국문화 상징 사전, 민족 생활어 사전, 야생 문화 사전, 언어학 사전, 응용언어학 사전, 국어학사전, 한국어교육학 사전, 영어교육 사전도 공부할 때 가까이해야 하는 사전들입니다. 교육학 사전도 여러 권짜리가 눈에 뜨입니다.     북한에서 나온 사전이나 중국 조선족 출판사에서 나온 사전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종종은 한국어 관련 사전을 북한이 더 자세하게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의성어, 의태어 사전은 공부에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사전도 세밀한 종류에 따라 사전이 많습니다. 유어(類語) 사전과 연어 사전이 몇 권씩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조선어 사전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단어 설명이 어떤 것은 논문 수준입니다. 이 밖에도 영어 어원사전, 일본어 어원사전 등도 여러 권씩 있네요. 저도 사전이 백 권은 넘겠네요.   최근 치매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인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치매라는 단어가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인데 우리가 아무 스스럼 없이 사용하기에 예전 사전으로 원 의미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세영 선생의 조선어 사전에는 치매를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멍청이’. 우리 할아버지는 치매라는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치매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전을 보는 게 즐겁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전 교육학 사전도 한국어교육학 사전 조선어 사전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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