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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누리와 나라와 나

우리말에서 ‘누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온 누리’라는 말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누리이기에 살아간다는 말을 ‘누리다’라고 합니다, 보통 누리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입니다. 복을 누린다든지, 천수를 누린다든지 할 때 쓰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사는 게 좋은 것이죠. 삶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만나는 하루하루는 분명 행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가 모양을 바꾸면 나라가 됩니다. 나라가 꼭 국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나라라는 개념도 불분명하였습니다.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모여 사는 곳이면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곧 누리인 셈입니다.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 곳이 넓어지면 누리입니다. 당연히 나라의 경계도 넓었습니다. 이곳이 힘들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이 힘들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떠나는 이를 욕하지 않고, 찾아온 이를 내쫓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래서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한민족만 하여도 수많은 이민과 귀화가 있었습니다. 조선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 가서 중국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땅이 힘드니 건너가서 살았던 것이죠. 고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민은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수많은 이민이 있습니다. 미국 자체가 이민으로 이루어진 곳이니 한민족은 조금 늦게 이민 간 것뿐입니다. 먼저 이민 온 사람이 늦게 이민 온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가여운 일입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책을 봐도 모두 이민과 귀화의 역사입니다. 사서삼경을 보아도, 불경을 보아도, 기독교 성경을 보아도 모두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인구가 많아지는 방법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고,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살기 싫어지는 겁니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에 갈 이유가 없고, 나도 살기 빠듯한데 아이를 낳아 키울 이유도 없습니다. 인구 걱정이 된다면 나라를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백성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민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좋지 않으면 안 올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사람도 급격히 줄 겁니다. 유학생도, 이주노동자도, 결혼이민자도 올 이유가 없겠지요. 한국이 살 만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나가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죠. 이민은 여기보다 그곳이 나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재외동포가 많은 게 자랑은 아닌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민족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의 과거입니다. 유학생도 많았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어느 곳에 가 봐도 한국 유학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인구수 대비 늘 1등이었습니다. 유학생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맞지만 꼭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젊은 여성이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결혼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결혼 이민이 이민의 물꼬이기도 했죠.   나라가 누리가 되고, 누리가 나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라 안에만 갇혀있을 필요도 없고, 내 나라가 아니라고 배척하거나 차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비자가 늘고, 국경의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오히려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디 내 나라 속에 갇혀 살지 않기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런 차별의 나라라도 좋다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글로벌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노력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글로벌 세계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편 ‘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죠. 그런데 보통은 ‘나, 민족, 사람’ 등에 해당하는 말은 같은 어원인 경우도 많습니다. 나를 의미하는 말이 사실은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사람이라는 말이 민족명, 국가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 명을 보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사람’도 신라, 사로 등과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옛 우리말에서는 ‘나, 노, 라’ 등이 땅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라’도 땅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새 땅 또는 동쪽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새’가 동쪽을 의미하고 태양을 의미합니다. 나는 나라에 살고, 누리에 사는 나입니다. 너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누리 나라 누리가 모양 결혼 이민 모두 이민

2025-02-16

[아름다운 우리말] 내가 꿈꾸는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는 너무 단순해서 꿈까지 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나라입니다. 우선 어른이 존경받고 아이가 사랑받는 나라입니다. 존경할 어른이 없다고 말하지만, 존경하는 젊은이도 적습니다. 아이들이 엉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이를 더 사랑해주는 어른도 적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게 무슨 꿈이냐고 하겠지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 세상에서 남녀의 사랑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꼭 결혼해야 하고,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혼과 아이가 부담스럽다면 그건 잘못된 세상입니다.     아이들은 집 밖에서 뛰놀기를 꺼리고, 부모는 아이들을 밖에 내놓기 두렵습니다. 이제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어둑한 밤길을 찾아다니는 부모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세상을 원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교육이 폭력이 되고, 교훈이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확천금을 노릴 수밖에 만들어진 현실이 한탄스럽습니다. 젊은이는 열심히 살아도 집을 살 수 없고, 노인은 집에 묶인 돈 때문에 허덕이며 삽니다. 흐르지 않는 경제에 경기는 더 나빠지고,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하고 싶은 자리가 없는 게 답답합니다. 빈부의 격차는 실제보다 심리적으로 확대되고, 높은 곳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합니다. 증오는 다시 혐오를 낳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를 혐오합니다.     특정한 국가를 혐오하고, 특정한 인종을 차별하며, 사람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장의 방식도 폭력적입니다. 말이 통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말로 해도 그냥 말이 아닙니다. 온갖 더러운 말과 분노의 말이 한가득입니다. 이해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용서와 관용은 없습니다. 배려와 양보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것을 미워하면서 세상이 온통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자연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는 바르지 않습니다. 경제는 가진 자의 경제입니다. 종교는 평화에서 멀어집니다. 학문은 실용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세대가 갈라지고, 남녀가 나뉩니다. 아름다운 가치를 이야기하면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상은 환상 취급을 받습니다. 환상은 미친 짓으로 규정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꿈꾸는 것조차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어른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바랍니다. 다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 아이를 아껴주기 바랍니다. 종교와 철학이 귀한 대접을 받아야 세상이 바뀝니다. 종교와 철학에 욕심이 없어야 그 대접을 받습니다. 실용에 가치를 더한 세상이 되기 바랍니다. 달라서 더 특별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극단의 세상을 걷어내야 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꿈입니까? 꿈이어야 합니까? 원래 그래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 태초의 가치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큰 꿈은 나부터 꾸어야 합니다. 내 꿈을 다른 이가 대신 꾸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귀한 책을 읽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나라 환상 취급

2025-02-09

[아름다운 우리말] 손의 등과 목과 가락과 바닥과 벽과 금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단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고, 아예 새롭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말을 이용할 때 편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은 두 단어를 합쳐서 한 단어로 만드는 겁니다. 모두 완전히 새로 만든다면 세상에는 어휘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겁니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언어에도 경제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말의 신체어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 때 기존의 단어를 이용하여 체계화하였습니다. 이 점이 다른 언어와 다른 특징입니다. 재미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주 드는 예로서 ‘눈물’이 있습니다. 눈에서 나오는 물이니까 눈물이라고 한 겁니다. 코에서 나온 물은 ‘콧물’이죠. 이렇게 만든 단어가 일반적일 것 같지만 대부분의 언어에서 이런 단어 구성이 없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눈물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두 단어와 상관없는 새로운 단어를 만듭니다. 물론 상관없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은 아니고, 방언이나 다른 나라 말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습니다. 어원 연구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침, 땀, 오줌’ 등은 몸에서 나온 다른 물입니다. 침을 ‘입물’, 땀을 ‘몸물’이라고 하면 어색할 듯합니다.   손을 살펴보면 ‘손가락, 손등, 손바닥, 손목, 손톱, 손금’ 등의 어휘가 나타납니다. 손에 ‘가락, 등, 바닥, 목, 톱, 금’ 등이 붙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겁니다. 손가락은 발가락, 머리카락과 연결됩니다. 손등의 경우는 당연히 등과 연결되고, 발등과도 연결이 됩니다. 손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목, 발목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목은 길목이나 골목과도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목이 좋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좁은 부분이나 들어가는 부분을 목이라고 하는 겁니다.     손바닥은 재미있는 어휘입니다. ‘발바닥’과 연결이 되는데 손바닥을 치는 행위는 손뼉을 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손+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닥을 세우면 벽이 되는 겁니다. 손바닥의 방언에는 ‘손벽’이 나타나 흥미롭습니다. 발벽을 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발뼉’이라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발바닥으로 손뼉처럼 치려고 애쓰던 동생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침팬지의 모습을 보고 따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발뼉을 친 거네요.   손톱도 재미있습니다. 톱은 무엇을 자를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손톱도 톱 못지않게 유용합니다. 손톱으로 끊어내는 일이 많습니다. 반면에 발톱으로 무엇을 자르는 건 본 적이 없습니다. 진기명기에 나올 만한 일이지요. 아무튼 손톱의 영향으로 발톱이라는 말도 쓰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손금은 손바닥의 줄을 의미합니다. 손바닥에 새겨진 금이지요. 운명을 점치는 중요한 표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발금’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발금을 볼 일도 없겠지요.   신체어는 수많은 곳에 응용되어 사용됩니다. 머리는 ‘위’, 허리는 ‘중간’, 다리는 아래를 의미합니다. 산마루를 ‘산머리’라고도 하는데 정상 부분입니다. 산을 넘어가는 부분은 ‘고개’라고 하죠. 신체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산등성이는 ‘등’과 관련이 있고, 산허리는 ‘허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코나 곶이 들어간 지명은 뾰족한 곳을 나타냅니다. 신체 관련 어휘들은 우리말의 특징을 보여주는 보물 창고입니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 설명해 준다면 더욱 효과적일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가락과 바닥 가락과 바닥 단어 구성 손가락 손등

2025-02-02

[아름다운 우리말] 반복의 미학, 되풀이의 의미

말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여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반복은 몇 가지 의미가 있을 겁니다. 우선은 더듬는 경우도 있겠죠. 어떤 말이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시간을 벌기도 합니다. 반복하면 강조가 되기도 하고, 복수의 의미를 보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여러 번 쓰면 강조고, 같은 대상을 반복하면 여럿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을 반복할 때의 기능은 대표적으로는 강조겠죠. 부사를 반복하면 강조 효과가 도드라집니다. ‘아주 예쁘다’를 강조하면 ‘아주 아주 아주 예쁘다’라고 합니다. ‘너무너무 너무 맛있다’고 하면 강조가 되는 겁니다. 요즘에 많이 쓰는 부사로는 ‘진짜 진짜’가 있네요. 이런 예들을 보면 강조의 느낌이 그대로 다가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강조하고 싶다면 반복하면 됩니다.   명사를 반복할 때는 주로 복수의 의미가 됩니다. 여러 개라는 것을 한자어로 할 때는 각각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복수의 의미입니다. 마을 마을마다, 골짜기 골짜기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같은 단어가 중복하여 형성된 말을 첩어라고 합니다. 중첩과 중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로 ‘-마다’ 또는 ‘-씩’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입니다. 첩어가 복수를 나타내는 언어는 많습니다. 인도네시아어가 대표적입니다. 집집은 복수이지만 새로운 단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말에서 첩형이 제일 활발하게 일어나는 말은 의성어와 의태어입니다. 이때 첩형은 주로 반복된 소리나 동작이나 형태 등을 나타냅니다. 웃음소리는 대부분 첩형입니다. ‘하하/ 허허/ 호호, 깔깔/ 껄껄/ 낄낄’ 등이 있습니다. 농담을 말할 때, 웃음소리가 첩형이 안 되면 느낌이 이상해집니다. ‘헤~, 흐~’ 등은 ‘헤헤, 흐흐’와 느낌이 다르다. 소리가 연속적이며 의성어가 연속적인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쾅’은 한 번 떨어지는 소리라면, ‘쾅쾅’은 연속적인 소리임을 나타냅니다.     동작은 당연히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걸음이 대표적입니다. 아장아장은 아기가 걸음을 반복하는 모습입니다. 어슬렁어슬렁, 뚜벅뚜벅, 터벅터벅은 모두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당연히 반복적인 모습입니다. 훨훨, 펄펄, 출렁출렁, 깡충깡충 등 수많은 의태어가 첩어입니다. 의태어가 단독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첩형이 많다는 것은 주목적이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숨이 끊어질 때 내는 소리인 단말마의 비명이라든가 갑작스러운 등장이라면 당연히 단독으로 쓰일 겁니다. ‘으악’이라는 소리와 ‘짠’하고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한편 의성어 첩형에서 소리가 일률적이지 않거나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모으교체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시계 소리입니다. ‘똑딱똑딱’은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아예 모양을 달리하는 ‘칙칙폭폭’과 같은 기차 소리도 있습니다. 의태어의 경우는 아예 음절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울긋불긋, 울퉁불퉁, 우락부락 등의 예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은 모음으로, 뒤는 자음으로 시작합니다. 알쏭달쏭, 오밀조밀 등도 앞부분의 초성이 모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원 탐구에서는 수수께끼가 됩니다. 울긋불긋은 ‘붉다’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알쏭은 ‘알다’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달쏭은 모르겠고, ‘조밀’은 ‘조밀하다’인 줄 알겠는데 오밀은 수수께끼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어원이 따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리듬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아리까리, 긴가민가’합니다. 그 밖에도 첩어, 되풀이 표현은 우리말을 맛있게 합니다. 한국어의 매력이 담뿍 담겨있는 어휘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되풀이 미학 미학 되풀이 첩어 되풀이 첩어가 복수

2025-01-26

[아름다운 우리말] 시절을 노래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읽다가 놀란 점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본의 시 장르인 ‘하이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도 일본 ‘바쇼’의 하이쿠를 읽은 적이 있고,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하이쿠의 예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 속의 여러 강의 내용이 하이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시를 소개하면서 하이쿠를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에서 하이쿠의 위력 또는 매력을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작은 도서관에서 ‘하이쿠’ 창작 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읽고 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무엇이 서양인에게 하이쿠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까요? 하이쿠에 나타나는 선시(禪詩)의 분위기가 작은 깨달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시조(時調)와 가사, 고려가요, 향가 등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시는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요? 어떤 매력으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대부분의 시조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 같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정철)’이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황진이)’ 같은 교훈성이 있는 시조가 많았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만 학생들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문학 교육이 오히려 문학 향유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절묘한 가락을 담은 시조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한다면 시조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여러 작가가 노력하고 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좋은 시조나 가사, 고려가요, 향가를 문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라 향가가 일본의 만엽집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요. 현존하지 않는 향가집 삼대목이 발견되기 기대해 봅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에서 향가의 매력을 다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나는 간다고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제망매가)’에서 누이를 잃은 깊은 슬픔에 동감합니다.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는 우리의 감정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민요와 이어지는 깊은 연계도 느낍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가시리)’나 ‘살어리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운율과 솔직함을 만납니다. 시조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등의 묘사에서 낭만을 만납니다.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들입니다. 시조의 매력을 잘 살피고,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도 알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넘어서는 공통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알리지 못한 매력을 찾아내어 세계 속으로 잘 소개해야겠습니다. 좋은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되겠습니다. 시조(時調)의 시는 때라는 뜻입니다. 한 시절을 노래하는 시(詩)가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래 우리 시조 향가집 삼대목 가사 고려가요

2025-01-19

[아름다운 우리말] 문화번역과 옥스퍼드 사전

한국어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 한국어에 대한 이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옥스퍼드 사전에 한국어 어휘가 계속 추가 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에 따르면 2021년에 오빠, 언니, 누나, 삼겹살, 스킨십, 잡채, 김밥, 콩글리시, 만화, 먹방, 애교, 대박, 반찬, 불고기, 치맥, 대발, 동치미, 파이팅, 갈비, 한류, 한복, 피시방, 당수도, 트로트, K-복합어, K-드라마 등의 단어가 등재되었고, 2024년에는 달고나, 노래방, 형, 막내, 찌개, 떡볶이, 판소리 등 7개 단어가 추가되었습니다.      한국어 어휘가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영어의 외래어 항목에 한국어가 추가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어 속에도 수많은 외래어가 있는데, 이제 한국어도 다른 언어에 외래어가 되어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외래어는 주로 문화와 함께 들어가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영어권으로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한국 문화가 세계 속으로 퍼지고 있으니 훨씬 많은 어휘가 영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추가된 한국어 어휘를 보면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호칭이나 지칭에 관한 어휘가 많다는 점입니다. 오빠, 언니, 누나, 형, 막내는 번역하기 매우 어려운 어휘입니다. 친족명이기는 하지만 친족명으로 쓰이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는 애인이나 남편을 오빠라고도 합니다. 외국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번역할 때는 더 괴로울 겁니다. 같은 오빠라는 어휘라고 하여도 번역은 달라져야 합니다.      언니도 매우 어려운 어휘죠. 한국의 미용실이나 식당에서 부르는 언니는 주로 친척이 아닙니다. 손님이 일하는 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이 손님을 부를 때도 있습니다.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누나, 형도 상황에 따라 번역을 달리해야 합니다. 막내가 새로 사전에 오른 것은 아마도 회사에서 막내라고 지칭하는 일이 많아서일 겁니다. 부서의 막내라는 표현을 막냇동생과 헷갈려서는 안 되겠죠. 막내라는 말의 느낌까지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음식 이름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겹살, 잡채, 김밥, 불고기, 치맥, 동치미, 갈비, 달고나, 찌개, 떡볶이 등이 있습니다. 영어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화적인 설명이 반드시 필요해 보입니다. ‘삼겹살과 소주’, ‘김밥과 떡볶이’, ‘치맥’ 등은 그야말로 문화어휘입니다. 문화적 배경이나 한국인의 생활을 이해해야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불고기와 갈비, 동치미와 찌개도 쉽지 않습니다. ‘달고나’는 아마도 오징어게임 때문에 포함이 된 듯합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문화번역이 어려운 어휘는 그대로 외래어가 되기도 합니다. 외래어가 되면 번역이 쉬워지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한류, 한복, 먹방, 만화, K-복합어 등은 한류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어휘입니다. 일본어의 ‘망가’라는 말이 있는데도 만화가 들어간 것은 흥미롭습니다. 또한 영어에서 기원한 말이 다시 의미가 바뀌어 영어로 들어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스킨십이나 파이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물론 콩글리시도 특이한 표현입니다. 외래어는 원어와는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의미의 범위나 용법에서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 들어왔던 외래어가 문화번역에서는 오히려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어 ‘마담’은 영어의 마담(madam)과는 큰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어가 세계 속에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좋은 의미의 어휘도 함께 퍼지면 좋겠습니다. 사랑이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고맙다 등의 어휘가 세계인의 마음에 새겨지기 바랍니다. ‘힘 내, 잘 될 거야, 멋지다’와 같은 표현도 기대해 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번역 옥스퍼드 한국어 어휘 한국어 번역 옥스퍼드 사전

2025-01-12

[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와 한국사 이야기

한국어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동이(東夷), 고조선 등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동이 관련 항목에 우리 선조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고조선, 부여,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동예, 옥저, 백제, 신라 등은 모두 동이족이 세운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책마다 차이가 있어서 그 무엇을 답이라고 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동이에 관한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다. 동방을 이(夷)라고 하고 이는 근본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의 나라라고 하고, 공자(孔子)도 동이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또한 중국에서 예를 잃으면 동이에서 구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책마다 표현이 다르니 후한서의 기록만이 맞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중국 사서의 기록이 다른 민족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좋게 평가하는 부분은 놀라운 것입니다. 따라서 나쁜 기록보다는 좋은 기록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은 대부분 부여계이고 언어가 같다고 설명합니다. 술과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점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한의 경우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줍니다. 예를 들면 한(韓)은 면적이 사방 4000리라고 후한서,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등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한반도 남쪽의 삼한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 열전에 보면 이에 대한 근본적인 실마리가 나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글에 마한(馬韓)은 고구려, 변한(弁韓)은 백제, 진한(辰韓)은 신라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봐야 삼한이 4000리가 될 겁니다. 관점을 바꾸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최치원은 그 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워낙 강대하여 중국의 남쪽인 오(吳)와 월(越)까지 공격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疆域)도 국사책에서 배운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진한과 변한이 언어와 풍속이 다른 점이 있다는 후한서의 언급도 주목해야 할 겁니다. 진한의 말이 마한과 달랐다는 삼국지의 언급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 변한과 진한의 언어가 서로 비슷하다는 삼국지의 언급에서 두 언어가 차이가 크지 않았음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옥저의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후한서는 전합니다. 삼국지에서도 고구려어와 옥저말이 대체적으로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濊)와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옛 조선 지역이라고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예와 고구려가 같은 종족이라고 노인들이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송사(宋史)에 보면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백제의 영토와는 전혀 다른 설명입니다. 구당서(舊唐書) 등에 보면 백제도 본래 부여의 별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양서(梁書)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언어가 거의 같음을 이야기합니다. 수서(隋書)에서는 백제를 설명하면서 신라, 고구려, 왜, 중국 사람이 섞여 있다고 언급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양서에서는 신라를 백제의 동남쪽 5000리 밖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북사(北史)나 수서(隋書) 등에서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풍속과 의복 등이 같다고 한 것은 삼국의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동이, 한국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언어의 계통도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그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국어와 만주어가 그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를 통해 한국어의 계통 속 궁금증을 풀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수수께끼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한국사 한국사 이야기 고구려 백제 후한서 삼국지

2025-01-05

[아름다운 우리말] 용어와 편견, 편견과 용어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어입니다. 용어를 정하고, 용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면 공부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시작은 반입니다. 용어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용어는 공부의 시작이면서, 자신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용어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어가 등장하면 우선 궁금증을 갖고 물어야 합니다. 이 용어가 적당한지, 아니면 문제가 있는지. 언어교육과 관련된 용어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용어는 그 말 때문에 편견이 생깁니다. 그것도 문제입니다. 용어는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용어 때문에 이미 선입견을 갖고 다가간다면 올바른 학문을 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용어는 관습이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어떤 용어는 다른 사람이 쓰기 때문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나 변명이 공부의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용어를 쓰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용어가 나오면 계속 묻습니다. 내 생각을 가두는 용어는 아닌지, 나를 편견 속에 빠뜨리는 용어는 아닌지 궁금해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내 사고의 폭은 넓어집니다. 의심은 나를 키웁니다.     귀화라는 말은 늘 고민입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귀화했다고 하는데 귀화라는 말은 돌아와야 성립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외국에 가서 살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귀화라는 말이 맞지만, 원래 한국에 살지 않았던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국 국적을 따는 것을 귀화라고 하면 어색합니다. 귀화어라는 용어도 어색합니다. 외국어이지만 한국어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외국어인지도 모르는 말을 귀화어라고 합니다. 김치, 붓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돌아온 말은 아닙니다. 귀화라는 표현이 왜 쓰였을까요?   귀국이라는 말을 보면 귀는 돌아오는 게 맞습니다. 돌아올 귀라고 해석도 합니다. 그런데 귀화라는 말을 찾아보면 돌아오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임금님이 덕으로 다스리면 이웃 나라의 백성이 감화를 받아서 그 나라로 몰려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겁니다. 학정을 피해서 덕치 국가로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귀화라고 했습니다. 즉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백성이 되기를 청하는 겁니다. 물론 귀화를 받아들인 나라에서도 차별은 없었을 겁니다. 귀화나 귀화어는 그런 개념입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살고 싶다고 청하는 것이 귀화이고, 한국어 속에서 구별되지 않게 자리 잡은 말이 귀화어입니다. 모국의 어려운 사정으로 난민 심사를 신청하는 것도 귀화 신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도입국자녀라는 말도 심각합니다. 이 말은 아이가 아주 어릴 때가 아니라 학생 시절에 한국에 들어온 아이를 말합니다. 성인도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듣기만 하여도 부모가 이혼 후 재혼 가정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보통 이혼 후에 전 배우자의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입국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숨기고 싶어도 중도입국자녀라는 표현만 들으면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요즘은 학령기 이주 청소년 등의 용어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민자라는 용어도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결혼을 통해서 경제적 사정을 바꾸기 위해서 입국한 사람이 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상 속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선진국에서 온 경우에도 결혼이민자라는 범주에 넣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주 여성이라는 용어로 폭넓게 보아야 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주 여성이라고 하면 이주 남성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도 이주 노동자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정의만큼이나 어려운 논의로 보입니다. 용어에는 관점과 철학이 담기기도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용어 편견 용어 때문 귀화 신청 편견 편견

2024-12-29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를 어떻게 나눌까?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그 언어들은 어떤 언어와는 가까워서 이해가 가능할 정도이며, 어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언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어를 분류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로 이해 가능한 정도도 한 기준이 된다. 역사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같은 계통의 언어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고, 공시적으로 본다면 같은 유형의 언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형적 분류는 같은 역사적 계통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연구는 아니다. 따라서 유형 연구에서 역사와 지리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언어가 어떤 유형을 나타내는지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형 연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어의 변화이다. A. W. Schlegrl(1818)에 따르면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로 나눌 수 있다.     고립어는 중국어가 대표적이다. 각 단어는 각각의 의미를 갖고 다른 단어와 분리된다. 고립어 중에는 성조가 발달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교착어의 대표적인 언어는 한국어이다. 각 단어에 다양한 의미요소가 첨가된다. 각각의 요소는 한 가지 기능을 담당한다. 조사, 접미사, 어미가 연속적으로 첨가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부터조차도’ 같은 형태도 가능하며, ‘가시었겠다’와 같은 결합도 가능하다. ‘어간 + 존경 + 과거시제 + 추측 + 어미’의 첨가가 가능한 것이다.   굴절어의 대표는 라틴어나 영어를 들 수 있다. 굴절어는 하나의 요소가 둘 이상의 의미요소를 혼합하여 사용하거나 변형하여 사용한다. 영어의 is는 단수와 현재, 3인칭을 동시에 나타낸다. go와 went로 시제가 달라지는 예, ‘man - men, foot - feet’처럼 모음을 바꿔 복수로 나타내는 예 등이 있다. 세 가지 유형 분류 외에 후에 포합어의 분류가 추가된다. 대표적으로는 아메리카 인디언어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적 분류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모든 언어가 한 가지 유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립어도 첨가어의 요소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첨가어에도 굴절어, 고립어의 요소가 있고, 굴절어에도 첨가어적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복수형 접미사인 ‘s’의 경우는 첨가어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포합어가 유형 분류에 후에 추가 되었듯이 언어에 따라 새로운 유형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예로 들자면 체언에 붙는 ‘조사’와 용언 어간에 붙는 어미를 같은 유형으로 취급하여 교착한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단어의 자립성과도 관계되어 복잡성을 더한다.   유형 논의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분류는 어순일 것이다. 어순은 S(주어)+O(목적어)+V(서술어), S+V+O의 유형이 대표적이나 그렇지 않은 유형의 언어도 나타난다. 한국어처럼 격표지가 발달한 언어는 사실상 자유 어순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한국어는 밥을 나는 먹었다.’와 같이 OSV의 형식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어순의 도치도 강조 등의 화용적 목적을 위해서 가능하다.   고립어는 고정 어순일 가능성이 높고, 반면에 형태소에 의해서 격을 표시하는 언어는 자유 어순일 가능성이 높다. 알타이어 중에서도 주격 표지, 목적격 표지가 발달한 한국어와 일본어가 자유 어순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몽골어 등은 주격 표지가 없으므로 어순 이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주어의 혼동이 없는 예라면 표지가 없어도 어순의 이동이 가능하다. ‘나 밥 먹었어’와 ‘밥 나 먹었어’에서 주어의 혼동은 없다. 고대 라틴어, 그리스어, 게르만어 등도 SOV 형태의 언어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순의 유형이 변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순이 언어의 계통에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다.   한편 언어의 분류에서 주변의 언어와 연관성이 매우 낮은 언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사용하는 바스크어다. 이는 고대어가 유일하게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지역의 언어가 이른 시기에 이동해 와서 오랜 세월 정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도 다른 알타이어와의 공통점이 적어서 계통의 섬처럼 취급하는 학자도 있다. 언어를 나누는 기준을 살펴보면서 한국어는 어떤 계통에 포함시켜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아메리카 인디언어 유형적 분류 유형 분류

2024-12-22

[아름다운 우리말] 새로운 말과 문화번역

언어는 생명체와 같아서 늘 새로 태어나고 변화하고, 노쇠해지며,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래된 말은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어렵고, 새로운 말은 아직 배우지 않아서 어렵습니다. 번역에서 새말과 옛말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특히 새말은 계속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새로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대 차이의 영향도 있습니다. 청소년이 새로 쓰는 말을 장년이나 노년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문제도 있습니다. 게임과 관련된 수많은 어휘나 표현을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이 알기는 어렵습니다. 경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새로운 경제 용어를 알기도 어렵겠죠. 기기에 관심이 없는 기계치들이 새로운 기계에 쓰이는 말을 알기 힘듭니다. 종종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말 중에도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새로운 말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새말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새말 중에는 유행어도 있습니다. 물론 유행어가 모두 새말은 아닙니다. 유행어는 그 시기에 많이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사회와 문화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사회의 모습이나 문화를 모른다면 유행어의 이해는 더 어려워집니다. 과거에 유행어를 많이 생산해 내는 사람은 주로 연예인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유행시킨 말이 세상을 돌아다녔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텔레비전보다 다양한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유행어가 만들어지고 퍼집니다. 이러한 말들 중에는 새로 만들어지 말도 많습니다. 새로 만든 말이 재미있어서 유행어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행어는 말 그대로 유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전 속으로 채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유행어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하여 더 어려운 단어나 표현이 됩니다. 유행어가 새로운 말로 굳어져서 사전 속으로 들어오면 신어가 됩니다. 신어는 보통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 말입니다. 일시적인 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유행어나 신어는 한국의 콘텐츠에도 널리 쓰입니다. 한국 예능을 번역할 때 신어나 유행어를 모르면 번역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막에 쓰이는 말 중에도 유행어나 신어가 많습니다. 어쩌면 콘텐츠를 향유하는 층이 가장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표현이 유행어 속에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능을 번역하고자 한다면 더욱 신어와 유행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케이팝이나 케이 드라마에도 수많은 새말이 등장합니다. 한국 드라마와 한국 노래의 느낌을 잘 알기 위해서도 새말과 유행어를 잘 이해해야 할 겁니다.   주의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유행어는 아무래도 말초적인 성격이 있고, 감정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채 걸러지지 않고 세상에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행어에 욕설과 같은 비속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유행어나 신어에 차별어가 있기도 합니다.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인종, 성적 취향을 비웃는 표현을 담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유행어가 혐오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행어와 신어를 공부하되, 걸러내어야 할 차별어와 비속어는 잘 이해하여야 할 겁니다. 한국어를 공부했는데, 나쁜 표현을 잔뜩 알게 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물론 문화번역에 나쁜 말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해는 하되 표현은 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번역을 통해 스스로가 성장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번역 새말과 유행어 유행어 공부 새말과 옛말

2024-12-15

[아름다운 우리말] 맛을 번역하다

한국어의 번역에서 정말 어려운 어휘는 맛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한국어의 형용사가 가장 발달한 부분도 맛이나 색깔 관련 어휘로 보입니다. 아마 한국어의 맛을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금방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겁니다. 따라서 그 맛의 느낌을 구별하고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올바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번역은 어휘 대 어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휘 대 표현 혹은 표현 대 어휘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우리말에서는 한 단어인데 외국어에서는 설명해야만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한국어 단어를 외국어에서 문장으로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맛 관련 어휘입니다. 한국어의 맛에 관한 어휘를 볼까요? 달다, 쓰다, 맵다, 시다, 짜다 등이 있겠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세밀한 맛을 나타내는 어휘도 많습니다. 갑자기 ‘텁텁하다’가 떠오릅니다. 또한 우리말의 감각어는 서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물이 시원하다고 하는데, 이는 맛을 나타내는 미각어도 될 수 있고, 날씨를 나타내는 촉각어도 될 수 있습니다. 종종은시각어나후각어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눈도 시원하고, 코도 시원하니 말입니다. 하긴 행동이 시원하기도 합니다.   달다의 경우에 외국어로 번역하면 한 단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정말 복잡합니다. 우선 달다라는 말은 안 좋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달다는 말을 들으면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한국어 미각은 반복해서 사용하면 맛이 좋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달달하다’가 바로 그 예입니다. 달달한 것은 좋은 겁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달달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달다는 표현을 입맛 돌게 하려면 ‘-콤’을 붙이면 됩니다. 달콤이라는 말의 느낌을 한국인이 좋아하는 듯합니다. 상표에도 달콤은 자주 등장합니다. 아주 달지는 않고 약간 단 경우에는 달짝지근하다고 합니다. 단맛이 좀 덜한 경우에는 모음을 음성모음으로 바꾸어 들쩍지근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달다의 경우만 봐도 정말 복잡합니다. 들다라는 말이 달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쓰다의 경우도 한국어에서는 나쁜 맛이 아닙니다. 써도 좋은 맛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역시 달달하다처럼 쓰다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씁쓸하다고 하면 맛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음을 바꾸어 쌉쌀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맛있는 쓴맛이 되기도 합니다. 맵다의 경우는 반복해서 쓰지는 않고, 콤만 붙여서 사용합니다. 매콤하다는 표현입니다. 맛있게 매운 느낌입니다.     시다의 경우는 시큼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역시 모음 때문인지 맛있는 신맛의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이때도 모음을 ‘애’로 밝게 바꾸어줍니다. 새콤하다고 하면 맛있는 신맛의 느낌이 납니다. 짜다는 쓰다와 비슷합니다. 콤이 붙을 수는 없고 반복해서 짭짤하다고 합니다. 짭조름하고 찝찔한 맛으로 조금씩 느낌이 변화해 갑니다.    한국인의 입맛이 복잡하네요. 맛에 관한 말이 많다는 것은 맛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맛은 달달하고, 쌉쌀하고, 짭짤한 맛입니다. 또한 달콤하고, 매콤하고, 새콤한 맛입니다. 정말 복잡하면서도 다양하네요. 그 밖에도 외국인이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맛의 표현이 있습니다. 얼큰한 국물과 칼칼한 맛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새콤달콤한 맛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만약 이런 말을 잘 번역하려면 설명을 더 해 주어야 할 겁니다. 번역을 맛있게 해야겠네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 한국어 단어 한국어 미각 색깔 관련

2024-12-08

[아름다운 우리말] 사람을 번역하다

한국어 중에서 문화적 요소를 가득 담고 있는 것은 의외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부르는 말이나 가리키는 말만큼 문화를 담고 있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문화인류학에서 언어를 조사할 때 가장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친족명입니다. 한국어는 세계적으로 특이한 친족어 체계를 보입니다. 한국어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말만 잘 번역해도 번역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볼 때 어휘가 세분화된 것은 발달하였다는 의미이고, 관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한국어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쌀’에 관한 어휘가 많다고 소개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어에 쌀은 모, 벼, 쌀, 밥, 뫼 등으로 나타납니다. 뫼는 돌아가신 분께 바치는 밥입니다. 한국인은 쌀에 관심이 많고, 농경문화임을 보여줍니다.   한국어에서 친족명은 두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하나는 위와 아래의 구별이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형, 언니, 누나, 오빠입니다. 많은 언어, 혹은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위의 형제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한 구별이 없습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을 생각해 보시면 알 겁니다. 그런데 형제 중 아랫사람에 대한 구별은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동생’이면 끝입니다. 물론 여동생이나 남동생이라는 말도 가능합니다만, 동생이라고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언어 중에 이렇게 한 단어만 있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표현의 차이는 위와 아래를 바라보는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녀의 차이도 명확합니다. 아버지 쪽 남자 형제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의 구별이 있는 반면 어머니 쪽 남자 형제는 그냥 위와 아래 상관없이 외삼촌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여자 형제는 그저 고모입니다. 아버지의 누나인지 여동생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큰아버지의 부인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의 부인은 작은어머니라고 하는데, 외삼촌의 부인은 외숙모입니다. 어머니 오빠의 부인인데도 숙모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각 언어마다 친족어의 구별이 다르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외국인인 한국어 중에서 ‘내 동생’이라는 말이 가장 번역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내 동생이라는 말을 번역해 보세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영어로 이모, 고모, 외숙모,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를 구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번역에서 사람을 어떤 어휘로 번역할 것인가가 고통인 경우입니다.   선생님이라는 말도 번역이 어렵습니다. 한국에 오면 선생님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해가 갑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선생님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예전에는 사장님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직위를 모르면 무조건 사장님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요즘 가장 묘한 표현은 ‘언니’입니다. 언니라는 말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하는 말인데 나이 적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언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어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씨’를 높이는 말이라고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김 씨’라고 부르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군이나 양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존중에서 쓰는 말이라고도 하기 어렵습니다. 김 군이나 김 양은 오히려 무시하는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심지어 여사님이라는 말도 최근에는 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손님과 고객님은 어떤가요? 와이프나 서방님이라는 호칭어도 쉬운 말이 아닙니다.   한국어의 사람을 번역하는 게 정말 복잡합니다. 어쩌면 좋은 번역은 한국 사람을 잘 구별하여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어 공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서 시작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 큰어머니 작은아버지 한국어 배우기 한국어 공부

2024-12-01

[아름다운 우리말] 문화번역의 세계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글이나 말로 하는 게 번역이지만 요즘에는 말로 하는 번역은 통역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히는 통역도 번역의 일종이라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번역을 잘하려면 당연히 두 언어를 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참고할 다른 언어의 번역본이 필요할 때도 있어서 더 많은 언어를 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칫 번역을 언어의 문제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에서 실제로 어려운 것은 문화번역입니다. 아무리 언어를 잘한다고 해도, 사전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화적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한 문화를 다른 문화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두 문화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좋은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 나라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생활문화도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퇴근길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소주가 서민적이라는 느낌을 모른다면 번역은 실패한 것입니다. 한편 돼지고기와 술이 금기인 이슬람 문화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실제로 한국어 수업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선생님이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금기의 번역, 상징의 번역이 쉽지가 않습니다. 무엇이 금기이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아침에 까치가 울었다는 말이 손님이 온다는 의미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신체언어의 번역은 어떨까요? 발을 꼬고 앉아있는 모습,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은 문화권마다 해석이 달라집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문화도 있지만, 버릇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인사를 하는 모습도 번역에서는 어렵습니다. 눈을 마주 보며 인사하는 게 예의인 문화도 있고, 윗사람의 눈을 쳐다보면 문화도 있습니다. 신체언어만으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번역에서는 그 모습을 전부 담지 못하기도 합니다.   화행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감사의 표현, 사과의 표현이 문화마다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떤 문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잘못의 원인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은 문화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칭찬이나 불평에 대한 반응도 문제입니다. 문화에 따라 반응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같은 한국 문화라고 해도 연령층에 따라 다릅니다. 문화번역이 쉬운 게 아닙니다.   정신문화로 오면 번역은 정말 어렵습니다. 정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한을 어떻게 번역할까요? 한국인의 사랑과 다른 나라 사람의 사랑이 같은가요? 행복에 대한 개념도, 불행에 대한 개념도 다릅니다. 전생이나 내세에 대한 사고도 전혀 다릅니다. 현세적인 사고를 하는 문화와 내세를 중요시하는 문화는 관점이 전혀 다를 겁니다. 한국인의 무속관, 유교관을 어떻게 번역 속에 담을까요?   종교에 관한 내용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산스크리트어나 빠알리어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아홉 단계를 거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번역의 마지막 단계로 가면 한문만 잘 아는 사람이 문장을 다듬는 과정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깨달은 스님이 한문으로 적당한지를 살피기도 했다고 합니다. 종교에 대한 번역, 깨달음에 대한 번역은 그 종교에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 그렇다고 맞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화번역의 수준은 번역가의 수준이기도 하고, 그 사회의 문화교류와 문화이해의 수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노래, 문학작품이 세계로 번역되기 위해서는 언어뿐 아니라 문화이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한국어로 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어 학습자의 문화 능력 역시 높아져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번역 세계 통역도 번역 번역 상징 번역 깨달음

2024-11-24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데보라 스미스가 문학가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공공연한 희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한 작품을 두고 오역 논쟁도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제 문화 관련 수업 시간 중에 번역과 문화를 발표한 학생들도 채식주의자 번역에 오역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보아도 번역에는 틀린 부분이 나타납니다. 의도적이었을까요? 아니면 한국어 실력에서 온 문제일까요?   번역은 오역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역이 언어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문화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언어 실력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단 오역에서 언어 실력에 의한 문제는 논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내용은 정확하게 알았다고 해도 원저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전하기에는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의역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의도적인 오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오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생경하거나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문화를 달리 번역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됩니다. 물론 언어나 문화 번역 시에 주석이나 설명을 다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번역에서 가장 멀어진 것을 우리는 번안이라고 합니다. 소설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원래의 내용과 전체적인 스토리나 소재, 대사 등은 비슷한데 등장인물이나 장소 등은 독자들이 있는 곳으로 변경되는 경우입니다. 예전에 저작권 문제가 엄밀하지 않던 시절에는 원작자의 허락 없이 번안 작품을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나라의 유명한 작품이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노래라면 원작자를 안 밝히는 것은 표절이겠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그 기준도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스토리를 몰래 차용한 소설이나 영화 등은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번안과 차용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로 시작하는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하여 부른 것입니다. 원래 노래와 가사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도 매우 좋습니다. 박효신이 부른 ‘눈의 꽃’은 일본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입니다. 가사가 거의 같다는 점에서 번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곡을 부른 나카시마미카도 독특한 분위기로 노래를 부릅니다. 일본 노래 제목도 유키노 하나 즉, 눈의 꽃이라는 점에서 제목까지 같게 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눈의 꽃이라는 제목은 그 제목만 봐도 일본어의 형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었다면 눈꽃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도 일본어식 표현입니다. 당연히 우리말로는 피눈물입니다.   번안 소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신파극으로 유명한 조중환의 ‘장한몽(長恨夢)’일 겁니다. 이 소설은 일본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 작품 역시 원래는 영국의 작품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번안을 번안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안을 하면 문화와 배경, 등장인물 등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어찌 보면 문화 번역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과 번안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문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줍니다. 직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의역을 주로 하는 경우가 있고, 스토리만 남기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번역 속에서 문화의 문제를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과 번안 번역과 번안 번안 작품 번안 소설

2024-11-17

[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와 옥탑방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후 한국 영화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한국 영화가 갑자기 세계 속으로 등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를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상상 이상입니다. 한국 영화의 수준과 재미가 이미 할리우드의 수준을 넘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입니다.     전 세계적인 방송의 배급이 시작되고, 코로나19라는 위기와 맞물리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그야말로 천정부지입니다. 서구 시장에 그 시작을 알린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말에도 있었지만,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감상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다가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벽을 봉준호 감독이 깨뜨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화 기생충에서는 재미있는 번역이 많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옥스퍼드로 번역한다든지 하는 장면들입니다. ‘반지하’와 ‘짜파구리’도 번역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반지하 방에 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서구인에게는 충격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반지하는 한국에서 서민 생활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반지하 방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지하라는 말을 문화적으로 번역한다면 수많은 함의가 있을 겁니다.   반지하는 첫째,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입니다. 늦게 해가 뜨고 빨리 지는 어두운 곳이기도 합니다. 어두움이라는 상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둘째, 반지하는 사생활의 보장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쳐다보고, 들여다봅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엿보기도 하는 곳입니다. 쳐다보는 게 싫어서 하루 종일 커튼을 치기도 합니다. 더 어두워지는 곳이지요. 셋째,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먼지가 들이닥치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안락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인생의 종말로 갈 수도 있는 곳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은 가상의 공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서울의 수많은 사람이 반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고, 태풍이 불면 반지하는 늘 아슬아슬한 장소입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해가 발생하면 늘 제일 먼저 비추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제일 늦게 보여주던 곳인데 말입니다. 반지하라는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주거의 빈부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지하와 반대되는 공간이면서 낭만적인 공간처럼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옥탑방입니다. 옥상에 있는 작은 방에서 사는 모습이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시야가 탁 트이고,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죠. 종종 친구들과 모여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옥탑방은 때로 비가 새고, 춥고 더운 곳이고, 매우 저렴한 주거공간입니다. 반지하를 옥상으로 올려놓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지하가 가족의 공간이라면 옥탑방은 가난한 청년의 공간입니다. 서양의 펜트하우스와는 그야말로 거리가 멉니다. 천지 차이의 공간입니다. 그래도 옥탑방이 한국인에게 낭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다행입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의 주거문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밝은 곳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많습니다. 부잣집의 건물은 주로 갤러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화려한 건축물이나 넓은 마당의 저택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 한국에서 찾아보기 쉬운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지하와 옥탑방은 찾으려고만 마음을 먹으면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어두운 측면도 문화입니다. 어두운 부분, 어려운 부분에 대한 이해도 문화 이해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지하 옥탑방 반지하가 가족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2024-11-10

[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의 세계

한류를 이끈 드라마에는 특별한 소재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한국의 전통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만의 소재였습니다. 우리 역사가 소재가 되는 게 우리에게는 당연하겠지만 외국인도 좋아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대장금이 엄청나게 인기가 높을 때는 일회적인 현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남아시아, 중동 등에서도 인기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주몽이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의아함이 커졌습니다. 왜 한국의 사극이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요? 한국의 역사적 내용이나 복장, 전통문화에 대하여 외국인은 이해가 가능할까요?   물론 한국 사극의 인기는 스토리 전개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장금과 주몽뿐 아니고 그 후에도 사극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외국에는 한국 사극의 광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한국 역사드라마의 모든 내용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의 역사를 더 많이 아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들도 정확히 알고 있고, 역사적인 시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한국 드라마 팬 중에는 한국 사극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배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해 보면 사극이 참 많습니다. 한국 사극에 매력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삼국시대의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연개소문이 있고 우씨 왕후, 선덕여왕 등이 있습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나 고려 시대의 태조 왕건이나 고려 거란전쟁, 기황후 등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사극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드라마도,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숙종부터를 살펴보면 그 면면이 화려합니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고, 또 다른 부인인 영조의 어머니인 ‘동이’가 있습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야기가 있고, 손자인 정조 ‘이산’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선말의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도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중에는실재 인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실재 인물이라고 하여도 극히 일부분만 소재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허준, 황진이, 어사 박문수, 신돈 등도 그런 이야기에 속합니다. 퓨전 사극의 유행도 대단합니다. 소재만 사극의 형식을 빌려온 것입니다. 역사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옷이나 전통적인 내용만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균관 스캔들은 중동지역까지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해를 품은 달, 달의 연인, 다모, 구르미 그린 달빛, 슈룹 등 수많은 이야기가 사극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이제는 과거로 타임 슬립을 하거나 반대로 과거 사람이 현대로 오는 이야기 등에서도 사극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과거에서 온 ‘도깨비’나 과거로 간 ‘철인왕후’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제는 좀비 영화에도 사극이 등장합니다. ‘킹덤’은 좀비 사극입니다.     그런데 사극의 인기를 보면서 의아한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번역입니다. 때로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투가 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든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등은 어떻게 번역할까요? 내용뿐 아니라 그 분위기의 번역이 쉽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전통적인 소재는 번역이 매우 어려울 겁니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설명이나 허준에 나오는 한의학에 관한 설명도 무척 어려웠을 겁니다. 직위에 대한 번역도 쉽지 않습니다. 영의정이나 판서, 사또나 이방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사극을 정확하게 그 맛을 살리며 번역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합니다. 한국어의 수준도 더 높아져야 합니다.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의 갈 길이 멉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한국의 사극을 맛있고, 멋있게  번역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기 바랍니다.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사극 번역 사극 번역 한국 사극 한국 역사드라마

2024-11-03

[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무시하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깔본다고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물론 아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 강도는 훨씬 셉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무시를 ①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②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시가 안 보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내려 보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못 본 척이 아닐까 합니다. 봐도 못 본 척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면 기분이 상합니다. 인사는 사람의 일이라는 뜻인데,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안 한 것이고, 나를 사람 취급 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투명 인간 취급한 겁니다.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인 ‘업신여기다’는 방언에 ‘업시여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본 척도 안 하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겁니다. 무시하는 게 안 좋은 거죠.   그런데 무시해도 좋은 게 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무시하면 좋을까요? 우선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못 본 척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봤다면 아예 잊으면 더 좋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본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모르는 척도 배려입니다.     저는 무시의 상반되는 상황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다’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깔보다와내려다보다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올려보다나치켜뜨다도 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노려보다, 째려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는 게 감정을 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살펴보다와돌보다입니다. 살피는 것도 보는 것이기에 살펴보는 것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겹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살피는 것과 두리번거리는 것은 다르다고 봅니다. 무엇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살펴보는 것은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는 돌아보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말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돌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을 돌아보거나 건물을 돌아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본다는 말에서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런 느낌의 표현입니다.   무시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화가 나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돌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내 눈의 온도를 생각해 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우리말 표현 사람 취급 존재 의의

2024-10-27

[아름다운 우리말] 랑그와 파롤과 세상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먼저 맞닥뜨린 괴로운 용어가 저에게는 랑그와 파롤이었습니다. 언어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세운 개념으로 현대 언어학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랑그와 파롤은 설명도 어렵지만 이해도 간단치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랑그와 파롤의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히 파악이 안 되는데 번역어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언어학책에서는 그냥 ‘랑그’와 ‘파롤’이라고 씁니다.   랑그는 머릿속에 있는 공통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각각 ‘사람’이라고 말을 하면 어느 한 소리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각 개인이 사람이라고 발음을 할 때마다 소리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이 발음하였던 사람이라는 발음이 파롤입니다. 파롤은 변화하는 것이고, 랑그는 변화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파롤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랑그를 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기역 소리라고 인식하고 있는 음을 음운이라고 합니다. 이 음운이 바로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의 측면에서는 ‘나무’라고 말하면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개념을 랑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마다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소리를 연구하는 것은 음성학입니다. 음운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운을 연구하는 것은 음운론이고, 음성을 연구하는 것은 음성학이라고 하는데 연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론’과 ‘학’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도 사람마다 민족마다, 문화마다 인식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랑그와 파롤을 다시 찾아보면서 오랜 고민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소쉬르에게 랑그와 파롤이 중요했는지를 알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더 설명하자면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이 왜 현대 구조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치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해석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랑그는 사회이고, 파롤은 개인입니다. 랑그는 사회 속의 소통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공통을 찾아야 합니다. 공통을 발견하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랑그는 힘을 발휘합니다. 모두가 어긋나버리면 랑그는 힘을 잃습니다.   반면에 파롤은 개인이기 때문에 다름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변화는 개인 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랑그를 연구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현재에 주목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통시적인 언어이지만, 추상적인 공시성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파롤은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차이이면서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이면서 변화입니다. 이후의 연구에서 랑그보다 파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회 속의 소통과 조화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차이와 자유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랑그와 파롤은 각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소쉬르의 개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는 체계를 이루면 맞물려 있습니다. 랑그를 떠난 파롤은 소통의 세계를 벗어납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파롤이 사라진 랑그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답답하게 일치된 사회일 뿐입니다. 소쉬르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체계, 겉과 속의 체계를 나눕니다. 앞에서 설명한 음운과 음성, 공시와 통시, 개념과 청각영상 등은 모두 양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양면은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혼자인 듯하지만,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남과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남이 없다면 다르다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언어학의 개념을 살피면서 오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공시성에 연구 현대 언어학 음운과 음성

2024-10-20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의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언어는 늘 변한다. 그러면서도 늘 동시대 언중과 소통이 가능하다. 늘 변하면서도 늘 소통 가능한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개인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어린 시절의 내 언어와 현재의 내 언어는 전혀 다르며 앞으로의 언어도 달라질 것이다. 어릴 때 나의 말소리와 현재, 미래의 음성은 차이가 있다. 귀여운 목소리와 쉰 목소리가 같을 수 없다.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다. 어휘의 양과 질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릴 때 내가 사용한 어휘의 총량과 현재, 미래의 어휘량은 다르다.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어릴 때는 쓰지 않았던 경우가 많으며,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앞으로 계속, 자주 사용할지는 알 수 없다. 자주 쓰는 표현, 자주 쓰는 문법도 달라지고, 유행하는 새로운 말 등 계속해서 개인의 언어는 달라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여산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라는 말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를 보면 ‘사회(社會)’인데 여기서 사(社)는 토지의 신을 의미하며,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소사이어티의 번역어로서 ‘사’를 택한 것은 ‘축제, 제사’를 위해 모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사회’의 모습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에는 감사, 경배, 용서 등의 다양한 감정과 행위가 동반되었다. 이 속에서 조화와 협조가 필요하고, 그때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이 힘이 발휘한다.   따라서 언어는 사회 속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된다. 함부로 바뀌어서도 안 되고, 나만 바뀌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관계다. 사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만 빠르게 변해서는 안 되므로 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머물고 활동하는 사회와 다른 사회는 항상 소통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서로 떨어진 사회일수록 변화의 속도도 다르고, 변화의 결과도 다르다. 지역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다. 또한 공유한 집단에 따라서도 언어는 달라진다.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도 시간에 따라 언어가 변한다. 그 속도와 형태는 지역과 계층 또는 둘의 합 속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 변화의 모습을 살피고,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거슬러 오르는 것을 통시적 연구, 역사언어학이라고 할 수 있다. 통시는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시기를 전제로 한다. 조선시대의 언어가 현대에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이다. 신라시대의 언어와 고려시대의 언어와 조선시대, 현재의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인 것이다. 종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엄밀히 말해서는 정확한 한 시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시기가 있다고 가정하고 연구하는 것을 공시적 연구라고 한다. 16세기, 17세기 등등은 각각 공시적이고, 현대어 역시 공시적이다. 수많은 공시가 모여서 통시가 된다. 달리 말해 수많은 공시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통시적 연구이다. 역사언어학은 수많은 공시의 묶음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꼭 여러 언어를 비교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언어학이 비교언어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를 통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어의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그 꼭짓점을 찾다 보면 서로 관계있는 언어를 만나게 되고, 그 언어 사이의 공통점을 찾고, 변화 양상을 찾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언어학은 비교언어학이 된다. 비교언어학은 그 시작점이 역사언어학일 수밖에 없다. ‘비교’는 같은 계통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며, 같은 계통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 변화과정을 논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변한다. 언어는 변화 속에서 소통하며, 소통 속에서 변화한다. 역사언어학은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며, 우리가 서로 관련 있음을 찾는 과정이다. 언어의 형태, 음운, 의미의 변화를 살피면서 인간의 기원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변화의 자유로움을 찾기도 한다. 언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역사 계통 언어 언어 사이 그때 언어

2024-10-13

[아름다운 우리말] 아린 남산 풍경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이 기쁨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하고, 아련함이기도 합니다. 직접 가보는 곳도 있고, 생각 속에만 있기도 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곳도 있습니다. 가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과 멀리서 바라보는 감정은 각각 다릅니다. 거리가 보여주는 감정의 차이이기도 하고, 마음의 아릿함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제가 있는 학교의 연구실은 교수회관이라고 부릅니다. ‘회관’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오래된 느낌입니다. 어린이회관이나 문화회관, 마을회관 등이 생각납니다. 교수회관은 실제로도 오래된 건물이어서 감상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수회관에서 학교의 중앙도서관이 바로 연결되는 특이한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수들의 연구실을 둘러 베란다처럼 생긴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면 마음속 잡생각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구실 밖의 공간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입니다. 심지어 교수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마도 대부분일 겁니다. 저도 이곳에 나가본 게 오래되지 않습니다.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경희대에서 벚꽃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귀한 곳이기도 합니다. 봄에 혼자 벚꽃 잔치를 즐기면 왠지 마음이 부유해진 느낌입니다. 저를 찾는 제자들에게 이 귀한 광경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이 제일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녁놀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정말 멋진 곳이죠.   한편 여기에서 보이는 풍경 중 저의 마음을 울리는 장소도 있습니다. 바로 남산타워입니다. 남산타워는 서울타워나 엔 타워로 부르기도 하지만 제게는 남산타워라는 이름이 친숙합니다. 제게 남산타워는 때로는 첨탑으로, 때로는 바늘로 다가옵니다. 뾰족하네요~ 아슬아슬한 느낌입니다. 사실 저는 남산타워에 올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남산타워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25년을 살았습니다. 어릴 때 제 기억은 모두 남산과 남산타워입니다. 그 근처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녀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가에는 ‘남산’이 들어가 있습니다. 남산이 저의 고향인 셈입니다.   남산타워는 남산에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고향을 상징합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남산타워에 올라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산에는 자주 올라갔습니다. 문득 남산에 올라가 웅변 연습을 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목소리가 큰 것은 그때의 산 공부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산에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께 혼난 후에 남산으로 간 적도 있고, 왠지 기분이 울적해도 남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은 저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다시 그때를 돌아보면 남산은 즐거운 기억과 아린 기억이 엉켜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어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나 모든 게 싫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제 모습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저는 연구실에서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남산타워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가만히 그쪽을 바라봅니다. 노을이 질 때면 감성이 더 몰려듭니다. 첨탑이 더 뾰족하게 보이는 날이면 왠지 예전의 저로 돌아갑니다. 그때를 잘 이겨내고 자라난 제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고생 많았다, 잘 지나왔다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조만간 남산타워를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타워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새로운 기억이 될 듯도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남산 풍경 남산타워 아래 남산 풍경 모두 남산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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